인천에서 4시간 후면 여름의 그리움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곳. 제법 익숙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이름, 세부. 우리가 알던 천국, 그리고 또 다른 파라다이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늘 밤 비행기를 타고 가던 필리핀 여행이기에 이른 새벽의 찬 공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질 수 있었던 건 세부의 아침해가 이미 내 가슴 한가운데에 떠올랐기 때문. 그리고 몇 시간 후, 하늘에서 만난 세부의 아침은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채색돼 있었다.

색다른 방법으로 시작된 오랜만의 세부 여행은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간 이어진 가을 세부 여행, 지난 몇 번의 만남으로 남겨진  안타까움의 자리에 특별한 추억을 새겨 넣은 시간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올랑고 철새 도래지

필리핀에서 철새를 보러 간다는 얘기에 처음엔 고개를 갸웃했다. ‘철새는 한겨울에 우리 땅에 찾아와 머물다 가는 새들’이라는 생각 때문에 뜨거운 열대 기후의 필리핀에서 철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자못 궁금하면서 또 신선하기도 했다.


회색빛 하늘에 뒤덮여 검게 물든 바다는 오늘의 목적지가 그리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풍경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진정한 자연의 신비는 인간의 품에서 멀어져야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바다는 일렁임 없이 길을 열어주었고 올랑고 섬의 선착장까지 안전하게 우리가 탄 필리핀의 전통 배 방카를 인도했다.

이미 세부의 도시적인 이미지를 훌훌 털어버린 작은 시골 마을. 하지만 철새들이 모이는 곳은 그곳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다고 했다. 트라이시클(사람이 탈 수 있도록 보조 좌석을 설치한 삼륜 오토바이)을 타고 좁은 진흙길을 달린다. 덜컹거리는 트라이시클에 앉으니 낯선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세부의 휴양지나 도심에서만 머물렀다면 보지 못했을 필리핀의 평범하고 오래된 삶의 진실. 순식간에 지나치는 것이 못내 아쉬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이다.

드디어 철새 도래지에 도착, 관리인에게 간단한 설명을 듣고 철새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로 이동했다.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바닷물, 그 위로 듬성듬성 자라난 맹그로브 나무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만큼 훤히 열린 바다가 함께 연출하는 태고의 자연은 차분하고 또 몽환적이다.


인간과 철새의 만남을 이어주는 돌다리의 끝에 홀로 서 있는 전망대는 이토록 드넓은 땅 위에 허락된 단 하 나의 문명이다. 자연의 신비를 두 눈에 담고 싶어하는 인간을 위한 장소이면서, 철새들의 평안한 휴식을 지켜주기 위한 철새들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다. 안내원이 가리키는 곳을 망원경으로 들여다봤다.

시간이 맞지 않아 기대했던 철새들의 군무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개 한 마리가 그곳에서 철새들을 쫓아 뛰어놀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어쩌면 다시는 마주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 장면, 소소함에 숨은 필리핀의 정경 하나를 담았다.

바다 속 파라다이스, 날루수안 섬

필리핀의 바다라면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세부 여행에서 아일랜드 호핑투어는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방카를 타고 주변의 섬을 돌며 바다 위와 바다 속을 탐닉하는 시간. 일 년 열두 달, 같은 바다에서도 늘 다른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마치 먼 과거에 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긴 장대로 육지에서 방카를 밀어내던 어린 사공은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뱃머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그 시선을 따라 방카는 속력을 내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떠나온 곳이 보이지 않을 때쯤, 바다는 보이지 않던 풍경을 꺼내어 놓는다. 점점이 흩뿌려놓은 것 같은 섬들이 바다 위에 빼꼼 머리를 내민 모습. 그 키가 너무 낮아 마치 바다 위에 초록 잔디를 깔아놓은 것만 같다.
 

서서히 속력을 낮추다가 아예 모터를 꺼버린 방카는 멋진 목조 다리가 놓인 섬 앞에 멈춰섰다. 세부 호핑투어의 천국 중 하나인 자그마한 섬, 날루수안이다. 선착장에 내려 섬 안으로 연결되는 목조다리를 걸으며 바다 속을 들여다본다. 옥빛 바다는 자신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내어준다.

그 순수함은 이곳을 찾은 이들에게는 기쁨과 희망의 소식. 이곳의 하이라이트인 스노클링을 즐기러 가는 발걸음이 빨라질 수밖에 없다. 아담한 리조트 앞으로 투명에 가까운 바다가 손을 내민다. 필요한 장구를 착용하고 바다에 몸을 맡긴다. 마스크를 입에 물고 물속 세상으로 입수. 바다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전 하고 있을 뿐. 바다 위에서 들여다본 바다, 그보다 좀 더 아름다운 바다 속 이야기. 날루수안이 우리에게 보내는 비밀스러운 초대장이다.

바다 위 파라다이스 체험,
요트 투어

세부의 바다 위를 수놓는 것은 섬과 방카뿐만이 아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하얀 요트들이 출렁이는 파도를 가르며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더한다. 특별한 여행, 특별한 이들과 함께 누리는 바다 위의 낭만, 요트 투어를 떠났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오후의 선착장, 순백의 요트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돛을 펼치고 바람 따라 파도 따라 떠다니는 요트는 아니지만, 날렵한 몸매에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어딘지 믿음직스럽다.

듬직한 체구의 마도로스는 널찍한 창을 말없이 바라보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요트를 움직인다. 마치 어릴 적에 봤던 만화 영화 속 주인공을 떠올리게 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 요트를 타고 전 세계를 여행하는 꿈에 잠시 빠져본다.

요트의 내부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잘 갖춰진 편안한 휴식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요트를 타고 내부에만 있을 수는 없는 법.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밖으로 나가 요트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만끽한다.

배의 앞머리에 마련된 공간은 최고의 포토존이다. 곳곳이 다 멋진 사진을 보장하지만 특히 조종석 아래의 하얀 배경을 등지고 앉으면 요트가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선남선녀가 된 사진을 한 장씩 남겨준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순간이다.

힐루뚱안 섬에 머무르며 잠시 바다 속 구경을 하고 다시 요트에 올랐다. 어느새 준비했는지 와인과 탐스러운 열대과일들이 테이블에 놓여 있다. 붉은 와인 한잔을 따르고 돌아가는 길의 바다를 바라본다. 어느새 머리 위에 나타나 바다를 붉게 물들인 태양은 와인 한잔보다 더 진한 로맨스를 요트 위에 그려놓는다. 사랑이 무르익어간다.

세부 시티 투어

세부, 막탄, 라푸라푸 이 이름들은 우리가 흔히 세부라고 부르는 곳에 있는 도시의 이름들이다. 세부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멋진 휴양지들은 엄밀히 말해서 세부가 아닌 막탄에 있다.

막탄섬은 세부섬 옆에 위치한 아주 작은 섬으로 이곳에 막탄 시티와 라푸라푸 시티가 위치해 있다. 진짜 세부섬은 막탄섬과 다리로 연결되어 차로 약 20~30분 정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의 대표 도시가 바로 세부 시티이다.

아름다운 휴양지에서의 안락한 휴식으로 몸이 슬슬 간질간질해진다면 하루쯤 도시의 명소들을 둘러보는 건 어떨까.

<알레그레 기타 공장>

버스에서 내려 알레그레 기타 공장의 입구에 들어서자 기타를 만드는 장인들의 섬세한 손길이 가장 먼저 여행객을 맞이한다. 한쪽 공간에 꾸며진 공방, 기타를 들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타의 휘어짐을 관찰하는 장인의 모습은 벌써부터 그 소리가 궁금하게 만든다.

가업으로 3대째 잇고 있는 알레그레 가 사람들의 기타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필리핀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많은 프로 기타리스트들이 이곳에 와서 직접 기타를 보고 또 구매하기 위해 세부를 찾을 정도로 이곳의 기타는 좋은 품질과 착한 가격으로 유명하다. 하나하나 장인들이 손으로 직접 만들어 튼튼하고 정교하며 음색이 맑은 것이 특징이라고.

공장을 방문하는 고객들은 고급 기타를 직접 만져볼 수 있고, 그 기타로 연주도 들어볼 수 있는 투어가 가능하다. 기타의 가격대는 2500페소에서부터 7만페소까지 다양하게 마련돼 있으며 해외 수출용 기타도 준비돼 있다.

<아바타 액세서리>

라푸라푸 시티의 한적한 길가에 위치한 아바타 액세서리는 세부를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곳이다. 조금은 낡은 듯 보이는 건물이지만 내부의 쇼룸과 숍은 화려함과 아기자기함으로 가득 찬 신세계. 여성들이라면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지 않을까 싶은 다양한 종류의 액세서리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이곳을 찾은 이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쇼룸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고양이 한 마리마저 예쁜 액세서리가 되는 이곳을 찾으면 액세서리를 만드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세부의 기념품 숍에 가면 볼 수 있던 제품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만들어진다고 설명하는 안내원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필리핀 액세서리 산업의 선구자 중 하나로, 1974년부터 이 산업에 몸담은 카룽가이 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아바타 액세서리는 처음 출범했을 당시 전통 필리핀 나무와 조개류로 만든 상품에 초점을 두었지만  2000년부터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며 다양한 액세서리를 출시하고 있다.

아바타 액세서리는 스와로브스키 ‘트렌드세터’ 대열에 포함되는 등 다양한 수상 실적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세계적인 전시회에 참여해 작품을 내놓기도 한다. 위치는 막탄 세부국제공항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프로푸드 망고 팩토리>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열대과일을 꼽으라면 단연, 망고가 아닐까. 필리핀의 망고는 그 명성이 세계적으로 자자하다. 그리고 프로푸드 망고 팩토리는 필리핀에서도 가장 큰 망고 및 과일 생산업체다.

필리핀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많이들 사오는 말린 망고 제품은 대부분 프로푸드 망고 팩토리의 제품이라 해도 괜찮을 만큼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회사이기도 한 이곳은 여행객들을 위한 망고 팩토리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드라이 망고를 만드는 다양한 과정을 둘러보고 갤러리에서 제품 구매도 가능한 이 투어에 참여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망고를 등급에 따라 분류하고 또 껍질을 벗겨내는 묘기를 볼 수 있다.

망고의 달인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이들의 손을 거친 망고가 여러 가지 다양한 제품으로 다시 태어나 전 세계로 수출되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체험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은 망고 생산이 극히 적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특별한 풍경이기도 하다.

투어는 최소 10명 이상부터 진행 가능하고 비용은 성인 200페소, 어린이 100페소이며 약 90분간 소요된다.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가능하다.

 

세부에서 맛보는 필리핀 음식들

필리핀의 음식 중에는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만한 음식들이 많다. 우리가 흔히 즐겨먹는 음식과 거의 비슷한 맛과 모양의 음식이 많기 때문.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는 필리핀 음식 몇 가지를 소개한다.

레촌

   
 
필리핀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으로 아기 돼지를 장작불에 돌려 구워서 기름기를 뺀 통돼지 바비큐 요리. 필리핀 사람들은 큰 잔치가 있으면 늘 레촌 요리를 즐긴다.

 

불랄로

필리핀 전통음식 중 하나로 우리의 갈비탕과 그 모양이 나 맛이 거의 비슷하다. 소의 뒷다리를 장시간 끓여내 진한 맛이 일품이며 보양식으로 많이 즐긴다.

 

 

반싯
필리핀 잡채 요리. 면의 종류에 따라 반싯 칸톤, 반싯 비혼 등으로 불리며 필리핀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국민음식이다.

 

아도보
외국인들이 선정한 필리핀의 베스트 음식 1위를 무려 5년간이나 독점한 경력을 갖고 있는 요리로 우리나라의 장조림과 그 맛이 비슷하다. 닭고기나 돼지고기 등을 많이 사용한다.

 

감바스
과거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요리로 새콤하고 매콤한 맛이 입맛을 자극하는 새우 철 판 요리. 통통하고 부드러운 새우살에 배인 양념에 따라 맛이 좌우되는데 음식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프리랜서 김관수 기자>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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