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회사인 대우조선해양을 부실 감독했던 KDB산업은행 회장 출신의 홍기택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가 지난 달 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AIIB 첫 연차총회에 불참하고 이틀 뒤 돌연 휴직계를 내 파문이 일고 있다. 홍기택은 기획재정부 고위 간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휴직을 강행해서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고, 책임 회피와 돌출 행보로 눈총을 사고 있다.

AIIB는 중국이 주도해 아시아 인프라 시장을 관장하는 신설 국제금융기구다. 한국은 37억 달러(4조3200억 원)의 분담금을 내고 57개 회원국 중 지분 비율 5위의 국가다. 미국의 눈치를 보다 어렵사리 참여했다. 홍기택의 경박한 처신은 국제적 망신은 물론 국익을 크게 손상시키고 있어 그 책임이 무겁다.

괄낭(括囊)이라는 말은 ≪주역(周易)≫의 ‘괄낭무구(括囊无咎)’에서 나왔는데,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아니함을 뜻한다. 불가(佛家)에서도 ‘구화지문 설참신도’(口禍之門 舌斬身刀, 입은 재앙이 드나드는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라는 경구가 있다.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무시무시한 말이다.

정치권 인사도 아닌데 말조심을 하지 않아 패가망신을 한 사람이 허다하다. 홍기택의 경우도 입이 화근이었다. ‘삼사일언(三思一言, 세 번 신중하게 생각한 연후에 한 번 조심해서 말하라 )’이라는 경구는 아마도 홍기택 같은 경박한 사람들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닐까.

홍기택은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교사 출신이다. 덕분에 3년 임기의 KDB산업은행 회장 임기를 마친 후에도 AIIB 부총재가 된 지도 모른다. 그는 산은 회장에 취임한 이래 3조원 넘게 적자를 낸 회사 임직원들에게 877억원의 성과금을 지급토록 했는가 하면, 대우조선의 1조5000억 원 규모 분식회계에는 눈감고 4조2000억 원의 신규 지원을 퍼주었다. 그가 산은 회장을 맡는 동안 조선·해운업 구조조정은 미뤄졌으며, 그 바람에 정부와 한은이 11조원의 구조조정 자금을 내놨고 조선·해운업은 위기에 내몰려 있다.

최근 대우조선 구조조정 방안이 발표되면서 홍기택에 대한 문책 여론이 들끓자 홍기택은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청와대(안종범) 기획재정부(최경환) 금융위원회(임종룡)가 유동성 지원 결정을 한 것이며, 문건에는 은행별 지원 금액까지 써 있었다. 산업은행(홍기택)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면피성 발언을 했다. 더 나아가 “산업은행 자회사들에 대한 인사는 청와대·금융당국·산업은행이 각 3분의1을 챙겼다”고까지 폭로했다.

패군지장(敗軍之將)은 말이 없는 법인데,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홍기택은 유난히 입이 가벼워 탈도 많아 졌다. 향후 예상되는 검찰 수사·국회 청문회·감사원 감사를 의식한 노회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정권 후반기 레임덕 현상을 넘어 가히 ‘친박의 반란’이라고 할만하다.

박근혜 정부 금융계 인사의 최대 수혜자인 그가 이러는 게 참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 보인다. 여러 정황에 비춰 볼 때 홍기택의 발언은 비겁과 무책임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대통령인수위 핵심 분과로 꼽히는 경제1분과 인수위원 출신으로 금융당국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한 실세(實勢)였고, 유례없이 목소리가 큰 산은 회장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퇴임 후에도 AIIB 부총재로 재취업한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홍기택 스스로 “산업은행장 자리가 이렇게 나쁜 자리인지 몰랐다”고 했지만, 그것은 궁색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자신이 들러리 역할에 그쳤다고 강변할 것이 아니라 대우조선해양 관련 업무에서 자신이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점은 없는가 반성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했다. 나아가 유동성 지원 시점에 자리를 걸고 자신의 소신을 관철시켜야 옳았다.

대우조선 사장을 지낸 남상태, 고재호씨 등이 권력 유착과 비리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2008년을 정점으로 선박 수주가 줄고 중국 업체에 밀리면서 조선업은 구조조정 필요성이 제기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 해법과 구조조정을 외면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한 홍기택의 책임은 검찰 수사로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 이참에 AIIB 부총재도 우리가 후임자를 맡도록 요청하여 관철시켜야 한다.

산업은행은 노무현정부의 김창록부터 시작해 이명박정부의 민유성 강만수와 박근혜정부의 홍기택에 이르기까지 CEO 운이 없었다. 산업은행이 이제 ‘용도폐기론’ 내지 ‘무용론’ 앞에 서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의 기로에 선 산은이 명예회복을 하기 위해서 현 이동걸 회장의 지도력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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