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새의 날개, 백령
백령은 흰 새의 날개를 뜻한다. 철새들의 보금자리로 알려진 백령도는 한때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두루미가 머물렀던 곳이다. 백령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통 새하얀 날개를 가진 새들로 섬 전체가 뒤덮이던 시절의 이야기가 있다.
황해도의 어느 마을에 가난한 선비가 살았다. 그는 그 고을 원님의 딸과 연인사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된 원님은 당연히 딸이 선택한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원님은 그의 딸을 외딴 섬으로 쫓아버렸고 연인과 갈라지게 되었다.
그렇게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던 선비의 꿈에 우아한 백조 한 마리가 등장한다. 꿈에서 본 백조는 선비에게 흰 종이를 남기고 가는데 잠에서 깬 선비는 사랑하는 여인이 흰 날개의 섬이라 불리는 백령도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날이 밝자 선비는 장산곶으로 달려가 배를 타고 백령도로 향했고 그곳에서 꿈에도 그리던 연인과 재회하게 된다.
선비가 연인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탔던 장산곶은 백령도 해안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황해도 땅이다. 해무가 시야를 방해하는 날에도 장산곶은 손에 잡힐 듯 가깝기만 하다. 심청각에서 바라다 보이는 백령도의 바다는 유독 검푸른 색을 띄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다른 곳보다 더 깊고 푸른색의 인상적인 바다가 바로 ‘인당수’라 불리는 곳이다.
심청이 맹인인 아버지에게 광명을 선물하기 위해 몸을 던졌던 바로 그곳이다. 하늘도 감동한 효심을 가진 심청은 용왕의 보살핌으로 연꽃을 타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심청전을 읽으며 떠올린 거친 파도의 인당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헤아릴 수 없는 깊이는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몇 번이고 읽었던 동화 속 연꽃 안에서 수줍게 환생하는 심청의 모습은 어쩐지 상상할 때마다 조금씩 달랐다.
이 섬에 오기 전에는 몰랐던 가난한 선비와 원님 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제야 심청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는 듯 했다. ‘나의 목숨은 추호도 아깝지 않으나 앞 못 보는 우리 부친 광명천지를 보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리던 심청과 제 몸처럼 사랑했던 연인을 잃고 절망하던 원님의 딸, 그리고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실향민들의 애환은 모두 닮아있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바다 앞에서 통곡했던 이들의 눈물이 더 짙고 푸른 빛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인당수라 불리는 바다에는 북한 주민들의 배가 여러 척 떠 있었다. 황해도와의 거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깝다는 놀라운 사실이 현실적 풍경으로 펼쳐지니 그것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해무를 가르며 어업에 열중하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어선은 심청이가 몸을 실었던 연꽃처럼 유유히 바다 위를 오갔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삶 앞에서 분단이라는 이름조차 고요한 바다에 스민 듯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심청각
고전소설 심청전의 무대인 백령도 진촌리에 건립된 심청각. 인당수와 연봉바위, 장산곶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에는 공양미 300석에 인당수로 뛰어드는 심청상이 세워져 있다. 2층으로 된 심청각 내부에는 인형으로 심청전을 재현해놓아 이야기를 따라 둘러볼 수 있고, 기념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돼 있다. 그 외에도 심청전과 관련된 고서와 판소리, 영화대본이 전시돼 있다. 인천 옹진군 백령면 백령로 315번길.
백령도를 수식하는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고려의 충신 이대기가 남긴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문구다. 그리고 이러한 수식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두무진 일대다. 두무진의 본래 이름은 두모진이었는데 뾰족한 괴암들이 머리카락처럼 솟아났다는 뜻으로 붙여졌었다. 하지만 현재는 많은 기암괴석의 형상이 모자를 쓰고 있는 무사들의 모습 같다는 뜻의 두무진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두모진으로 불렸던 옛날이나 두무진으로 불리는 지금이나 이곳의 비경은 백령도 여행의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에 해적들이 이곳을 그들의 근거지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곳곳에 요새다운 곳이 즐비하다. 두무진을 둘러보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는 방법과 포구에서 배를 타고 둘러보는 방법이 있다.
서북쪽 해안가를 따라 4km에 걸쳐 낮게는 50m에서 높게는 100m에 이르는 규암 절벽이 이어져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10억 년 전부터 형성된 사암이 질곡의 세월을 넘으며 지금의 기이한 풍경을 탄생시켰다. 해안가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이름 모를 중국 대륙의 어느 협곡사이를 걷는 기분이 든다.
서해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웅장하고 신비한 풍경의 규암들은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선대암, 코끼리바위, 형제바위, 장군바위 등 다양한 이름들의 바위들이 한데 모여 신의 작품이라는 두무진을 이루고 있었다.
배를 타고 해안가로 나가니 물범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백령도 평화의 수호자라 불리는 점박이 물범은 그 별명이 조금은 무겁지 않나 싶을 만큼 귀여운 얼굴을 갖고 있다. 하루에 몇 번이고 오가는 유람선이 익숙한지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배 주변을 맴돌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점박이물범은 서해안 유일의 해양 포유류로 보호받고 있다. 머리 옆쪽에 새겨진 점들의 무늬가 모두 달라 개체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하니 사람의 지문과도 같은 고유의 무늬가 있는 셈이다.
나는 해안선을 돌며 절벽 전체를 하얗게 물들인 괭이갈매기의 집단번식지를 보았고 수면 위에 고개를 내밀며 장난치는 점박이 물범과 검은 색의 위용을 뽐내는 가마우지도 만났다. 서해의 최북단인 백령도에서 두무진 해안선 일주는 ‘환상코스’ 그 자체였다.
오색의 영롱함, 콩돌 해안
아기자기한 오색의 콩돌 모양이 해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콩돌 해안. 해안가 진입로부터 올망졸망한 크기의 콩돌들이 발가락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 마모를 거듭하며 지금의 콩 모양의 돌이 생겨났는데 그 때문인지 해안가는 크고 작은 자갈들로 가득했다.
오후의 태양을 받아낸 콩돌들은 오색이 아닌 형형색색의 영롱한 빛을 발산했다. 어떤 돌은 푸른 바다에 물들었고, 또 어떤 돌은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자연의 색감이 스민 잔잔함을 뽐내며 콩돌 해안은 오묘한 풍경을 연출했다. 어느 돌 하나 모난 곳 없이 동글동글 착하게 마모된 모습에 끌려 때 아닌 돌 줍기에 욕심이 일었다.
하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콩돌의 반출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콩돌은 바닷물을 따라 이리저리 기분 좋게 구르며 오늘도 더 동그랗게 마모되고 있었다. 아이들을 동반한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이 해안은 백령대교를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다.
콩돌 해안을 거닐 때 맨 처음 생각난 것은 거대한 규암에서 돌이 파쇄되었을 때, 거칠고 모났을 그것의 조각들이었다. 맨발로 산책해도 아프지 않은 콩돌이 되어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모으기까지 모난 돌들은 깊은 밤에도 쉬지 않고 제 몸을 해변에 굴렸을 것이다.
파도가 칠 때마다 귓가를 스치는 콩돌 구르는 소리조차 무심히 넘길 수 없었다.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은 쉬지 않고 몰려오는 파도의 무게를 오롯이 제 몸으로 묵직하게 받아낸 흔적들이기 때문이었다.
오색콩돌길
백령 유일의 천일염전과 갈대밭 그리고 콩돌 해변을 따라 걸으며 감상할 수 있는 길이다. 총 7.3km거리로 2시간 40분 정도 소요된다. 코스는 세계적 희귀새인 황새를 볼 수 있는 갈색 염전길에서 시작되어 콩돌 해안 주변의 농촌마을을 지나 콩돌 해안길로 이어진다. 특히 마지막 코스인 콩돌 해안길은 맨발로 걸으면 지압효과도 볼 수 있어 피곤함을 풀 수 있다. 트래킹의 시작은 백령대교를 건너 갈색 염전길 입구에서 출발한다.
여행의 시작과 끝,
용기포 선착장
용기포 선착장은 백령도 여행의 시작점인 동시에 끝이기도 하다. 배 멀미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해도 4시간의 뱃길은 만만치 않았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지나쳤던 용기포 선착장을 다시 찾았다. 선착장 주변은 꽤 많은 인파와 차량으로 혼잡스러웠지만 용기원산 전망대와 한가롭게 정박해 있는 갯배들이 어촌마을 특유의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 용기원산 정상에 있는 끝섬 전망대에 오르면 이 모든 풍경에 사곶 해변을 더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시멘트보다 부드럽지만 잘 파이지 않는 특수한 백사장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전망대에 올라 한 때 군 비행장으로 사용되었던 자료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간조 때에 맞춰 민낯을 드러낸 백사장의 광대한 넓이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비행장이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광활했다.
백령도는 1896년부터 교회가 세워진 한국 기독교 역사의 거점이다. 북한 땅을 통해 들어온 기독교의 역사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백령도 곳곳에는 교회가 많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찰은 몽운사가 유일하다.
백령도는 200년 동안 절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생계가 막막한 사람들은 육지로 떠났고 그와 함께 절도 사라졌다. 다행히 2003년에 백령도의 군부대와 인연을 갖고 있던 한 스님이 다시 백령도에 작은 절을 지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백령도 몽운사에 다시 목탁소리가 울렸다.
사실 백령도 여행에서 몽운사는 예정에 없었다. 몽운사에 가게 되었던 것은 거대한 대웅전이나 화려한 이정표 때문도 아니었다. 백령도 해안가를 따라가던 중 마치 재난 상황이라도 발생한 듯 거대한 괭이갈매기 수천 마리가 한 해안가에 밀집되어 맴도는 경이로운 풍경에 사로잡혀 차를 세웠다.
산란기를 맞아 새들은 제대로 번식하고 있었다. 새끼의 먹잇감을 찾아 분주히 바다를 오가는 어미들의 모습은 난장, 그 자체였다. 삶의 중심은 언제나 난장이었다. 그렇게 치열해야만 비로소 통과할 수 있었다. 그것은 조류에게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한 해변가를 완벽히 덮어버린 새떼들의 모습이 짙은 해무에 가려 꿈을 꾸는 듯 아련했다. 다만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은 귓가에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소리 덕분이었다.
[백령도 여행정보] 여객선 편의시설 & 숙식 주의할 점 |
<프리랜서 김소연 기자>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