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콧수염에 구레나룻 담력과 기개
- 자신의 과업에 모든 것을 건 단 한 사람

조선 시대 장수들은 기본적으로 무예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무예시험의 기초는 체력이다. 게다가 전국의 한 힘쓰는 한량들이 모두 응시하는 시험이다. 그 시험에서 이순신은 29명 중 12등으로 합격했다. 그 점에서 이순신은 붓을 든 선비들이나 평상시 단련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힘과 용기, 지혜를 갖춘 명장

조카 이분이 기록한 <이충무공행록>에서는 22세 겨울부터 무예를 배웠는데 팔심과 말 타고 활 쏘는 능력이 동료들에 비해 탁월했다고 한다. 또 같은 기록에는 넘어진 석인(石人)이 무거워 수십 명의 하인들이 세우지 못한 것을 지혜를 써서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도구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없고 등으로 떠밀었다는 것을 보면, 그 역시 강한 체력과 힘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순신 당시 혹은 그 직후까지의 현존기록 중에 이순신의 체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은 거의 없다. 그나마 상상케 해주는 기록은 윤휴(1617∼1680)의 기록이 유일하다. 윤휴의 아버지 윤효전은 이순신의 서녀(庶女)를 소실로 들였고, 그 서녀에게서 윤휴의 서얼형인 윤영을 낳았다. 게다가 윤휴의 스승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 이원익이다. 이원익은 전쟁 시기에 한산도를 방문해 이순신을 직접 만났다. 이순신의 파직을 반대했고, 구명운동을 했으며, 백의종군 중인 이순신을 위로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이순신의 외손자인 윤영을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

훗날 인조가 84세의 이원익에게 국방강화를 위한 명장을 추전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이순신 같은 사람을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이순신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순신 역시도 이원익에 대해 높게 평가했다. 1597년 칠천량 패전 이후, 선조와 조정에서는 조선 수군을 육군에 합류케 명령했다. 바로 그때, 이원익의 일기인 《이상국일기(李相國日記)》에 따르면, 12척 밖에 없는 조선 수군이라도 유지케 하려고 했던 이순신의 주장을 이원익이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상국(이원익)이 나의 계책을 전적으로 써 주었기에 지금 수군이 약간이라도 보존될 수 있었다. 이는 내 힘이 아니라, 상국의 힘이다”라고 했다.

윤휴는 그런 관계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후에 이순신에 대한 전기인 <통제사 이충무공 유사>와 이순신의 막하 장수들의 열전인 <제장전(諸將傳)>를 저술했다. <유사>는 이분의 <행록> 이후 두 번째 전기이다. <제장전>은 그 시대에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을 정리한 글이기도 하다. <유사> 내용 중에 윤휴가 이순신 집안사람과 이순신을 모신 사람들에게 이순신의 모습을 물어 남긴 기록이 있다.

▲ 체격이 컸고, 용기가 뛰어났다. 붉은 색 콧수염과 구레나룻에 담력과 기개가 있는 사람이었다(長軀精勇 赤丈順髥 膽氣人).

윤휴 표현을 기준으로 이순신의 체격 혹은 키를 상상할 수 있다. 이희근의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에 따르면, 서울대 의대 해부학교실 황영일·신동훈 교수팀이 15세기부터 19세기 조선사람 116명(남67명, 여49명)의 유골을 분석해 발표한 평균 키는 남자 161.1(±5.6)cm, 여자 148.9(±4.6)cm이다. 큰 체격이라는 관점에서 이순신은 최소한 166cm 보다는 컸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장수의 키로 이순신의 키를 상상할 수 있는 다른 단서도 있다. 첫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이다. 소년 시절부터 장사로 이름을 날렸다. 1974년 11월 발굴된 그의 무덤 속 관 내부 길이는 178cm였다. 박혜일은 《이순신의 일기》에서 관을 기준으로 김덕령의 키를 168cm 내외로 추정했다. 이 역시 조선 시대 평균 키보다는 크다. 두 번째는 장군 미라이다. 전승민의 《한국 미라》에는 두 명의 조선시대 장군 미라가 나온다. 1400년대 인물인 송효상 장군은 미라 키가 167.7cm이다. 17세기의 전(前) 삼도수군통제사 남오성 장군 미라는 190cm이었다. 미라라는 점에서 남오성의 실제 키는 2m 정도였다고 추정 한다.

윤휴의 기록과 이들 기록으로 이순신의 키를 추정해 보면, 특히 장군 출신들과 비교해 보면, 이순신은 당시 사람들보다 큰 최소 168cm 이상, 최대는 190cm에 이를 수도 있다. 어떻든 보통사람들보다는 크다.

▲ 1592년 3월 20일. 몸이 아주 불편해 일찍 들어왔다.
▲ 1592년 3월 21일. 맑았다. 몸이 불편했다. 아침 내내 누워 앓았다. 늦게 동헌에 나가 공무를 처리했다.

3월 20일 일기는 1월 1일부터 시작된 이순신의 일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불편한 몸 상태를 남긴 기록이다. 21일에는 결국 종일 누워 끙끙 앓았다. 그는 연초 임에도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전쟁 준비를 점검하기 위해 관할 지역을 바다로, 산으로 돌아다니다가 결국에는 탈이 났다.

《난중일기》는 7년 동안의 일기다. 그러나 사라진 일기도 있고, 일기를 쓸 형편이 되지 못해 쓰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대략 1600일 정도 일기이다. 그 중 그가 ‘몸이 불편했다’, ‘끙끙 앓았다’, ‘(식은 땀 혹은 열로 인해) 땀을 흘렸다’, ‘토하고 설사를 했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전체 약 136회가 언급된다.

일기가 상대적으로 많이 남은 1593년은 12회, 1594년은 40회, 1595년은 8회, 1596년은 53회가 나온다. 병 상태로 보면, 전쟁 기간 중 생겨난 전염병, 오랜  바다 생활에서 오는 풍토병이 주요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자리에 누워 신음하던 전후 상황을 보면, 전투와 군량 확보, 군사 모집에 따른 과로와 스트레스, 가족의 질병과 어머니에 대한 효심에 따른 걱정, 육체적 연령 증가에 따른 신체의 변화도 그 원인이다.

▲ 1596년 3월 17일. 이날 밤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 옷 두 벌이 다 젖었고, 이불도 젖었다. 몸이 불편했다.

이순신은 전쟁 기간 내내 그렇게 밤새 진땀을 흘렸다. 명량해전 전에는 수군을 수습하는 도중에 눈병에 걸렸고, 수군을 인수한 뒤에는 토하고 설사하면서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다. 명량 해전이 끝난 한 달 뒤인 10월 19일에는 코피를 한 되 넘게 쏟기도 했다. 전쟁은 강철 같은 이순신의 몸과 마음을 무너뜨렸다. 1594년 3월말, 무과시험 감독을 위해 이순신의 한산도 진영에 머물렀던 고상안은 당시의 이순신에 대해 “여윈 얼굴이어서 덕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입술도 뒤집혀 복스럽지 않았다.”고 했다. 몸과 마음의 병이 이순신의 몸을 여위게 했고, 심지어는 입술을 비틀리게 만든 것이다. 그 상태로 그는 계속 전쟁을 했다.

1598년 2월, 진영을 고금도로 옮긴 후, 친척인 현건에게 보낸 편지에는 젊은 시절과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 저는 오랫동안 전쟁터에 있어서 수염이란 수염은 다 하얗게 되었습니다. 훗날 마주쳐도 옛날의 제 모습으로는 이목조차 알아보실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 전쟁의 중에 이순신은 어께에 총상을 입기도 했다. 1592년 2차 출전 때, 그 첫날인 5월 29일, 이순신은 왼쪽 어깨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 상황에서 그는 계속 전투를 했고, 8월의 한산대첩, 10월의 부산포 해전을 승리로 만들었다. 몇 달 동안 피고름을 흘리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과업에 모든 것을 건 한 사람, 그게 이순신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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