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고건총리체제→총선후 대통령 보궐선거→개헌통한 권력분점정치권 일각서 “탄핵은 오래전부터 기획된 일련의 프로그램에 의한 것” 주장지난 12일의 대통령 탄핵 국회 의결은 결국 ‘내각제’를 고리로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이 이심전심으로 뭉친 것이라는 게 우리당 관계자들의 관측이다. 이 과정 속에서 <월간조선> 조갑제 대표 이사 겸 편집장이 대통령 탄핵에 불을 지폈다는 시각도 대두됐다. 탄핵정국 이후 정치권엔 꽤 설득력있는 시나리오가 나돈다.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 옹립설과 내각제 개헌론이 그것이다. 정치권에 나돌고 있는 두 사안을 전격 취재했다.모 방송 토론에서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은 야3당의 내각제 개헌 전략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다. 유의원은 “내각제 개헌이라는 것을 야3당이 직접 만나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 탄핵에 반대했던 자민련까지 갑자기 입장 선회한 것으로 볼 때 그들 사이에 이심전심으로 공통된 분모가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애초 내각제 개헌은 오래 전부터 구상되어 오던 보수 세력의 대안이었다. 홍사덕 한나라당 총무는 이미 84년부터 내각제 개헌을 구상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와 홍사덕 총무가 공론화 했는데 아직은 국민정서에 맞지 않다고 하여 그냥 수면 아래도 가라앉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 속에서 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총대를 메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유 의원은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항간에 떠도는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의 역할론에 대해서도 유 의원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 “조갑제 편집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탄핵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노 대통령 탄핵 이후 조순형 민주당 대표의 차기 대통령론과 한나라당의 행정권력 접수라는 구체적 그림까지 제시했다”고 말했다.실제 조갑제 편집장의 개인 홈페이지에 실린 글이 탄핵안 상정을 전후하여 주목되고 있다.

조 편집장은 작년 8월 20일 <숨은 그림:탄핵, 내각제, 정계 개편>이라는 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기 위해 한나라당, 자민련, 민주당 구파가 단합해야 한다”고 하여 노 대통령 탄핵과 개헌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한 발 더 나아가 12월 31일에는 아예 탄핵 후 정치 그림의 구체적 방안까지 제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뒤 조순형 민주당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올려야 한다”고 하여 열린우리당의 창당으로 심각한 피해 의식에 시달리고 있던 민주당 지도부를 부추겨 세웠다. 이 때부터 조순형 대표는 현저하게 ‘대통령 탄핵’이라는 말을 입에 자주 올리게 된다.조순형 대표는 지난 2월 5일 “4·15 총선 이후 국민 의사를 광범위하게 수렴해서 권력 구조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할 것”이라고 하여 개헌문제에 대해 운을 떼기 시작했다. 비단 민주당 조순형 대표만 개헌 논의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1월 24일 “분권형 대통령제이든 내각제이든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하여 본격적으로 개헌 이야기를 꺼냈다. 3월 10일에는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에서 최종 결정되면 뜻을 모아 대통령 선거할지 아니면 개헌할지 결정할 것”이라고 하여 개헌에 대한 의중을 털어놓았다. 과거 김대중 전대통령 시절부터 민주당의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해 왔던 황태연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장은 2월 25일 개헌 토론회에서 “내각제와 미국식 4년 중임 정부통령제의 장점을 결합한 개헌안을 총선 공약으로 내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만 해도 아직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겠다는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이면서도 분당 후 노 대통령 공격수로 맹활약 중인 민주당 김경재 의원은 더욱 적극적이다.

김 의원은 2월 21일 “한나라당이 과도기 지도자로 조순형 대표를 받아들여 준다면 압도적인 표로 탄핵을 이끌어낼 수 있고, 그런 다음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로 개헌하면 된다”고 하여 대통령 탄핵까지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 의원은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자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한나라당과 손을 잡더라도 권력 구조 개편을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할 때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이 압도적인 힘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인 것은 갑자기 튀어나온 돌발사태가 아니라는 게 우리당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자민련은 나중에 뛰어들었다고 해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종의 시나리오를 준비해 왔다는 것이다. 즉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고건 국무총리의 대통령 대행, 야당에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인사로 거국중립내각 구성, 4·15 총선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가 여권서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 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이 확정된 후 대통령 보궐 선거 내각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로 권력을 나눠 갖는다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변수가 너무 많은, 그야말로 시나리오일 뿐이다. 당장 이번 탄핵 가결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나고 있고, 야당은 극심한 후폭풍에 직면하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소장파가 지도부 퇴진을 요구하고 있고, 심지어 집단 탈당까지 점쳐지고 있다. 민주당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광주 전남 지역에서조차 민주당의 지지율이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다. 또한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도 야당의 국회시정연설을 거부하는 등 야당의 예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 대행 역시 국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야당의 주장대로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지금 상태로는 야당의 희망대로 될 지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이번 탄핵 소추는 근거가 없다’는 게 국내 헌법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이고, 외국 투자 전문 회사들도 대부분 대통령 탄핵안은 기각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럼에도 국민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야3당이 대통령 탄핵을 밀어붙이는 것을 지켜본 유시민 의원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야당이 충분히 예상되는 국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힘으로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는데, 이제 와서 무엇을 겁내겠느냐는 것이다. 총선 연기나 개헌 같은 극단적 선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유 의원은 “이번 탄핵 사태에서 국민들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 동안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 혼란의 원인이 야당이나 언론의 발목잡기 때문이라고 호소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국회 권력이 행정부 권력을 능가했다는 냉엄한 현실을 국민들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지금 야당의 개헌 시나리오를 막을 수 있는 힘은 오직 ‘국민들의 현명한 판단뿐’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물론 국정 혼란의 원인을 노무현 대통령 자신에게 찾는 것이 아니라 야당이나 언론에 돌리는 것은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할 대목이다.

그럼에도 국민의 소망이나 여론을 완전히 무시하는 야당의 행태가 비판받을 여지는 충분하다. 이번 탄핵안 사태에 대해 힘으로 밀어붙인 야당이나, 국민과 야당에 대한 사과를 끝까지 거부해서 ‘자업자득’이라는 비판을 받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애초 개혁을 외치고 창당한 열린우리당이나 승자는 없다. 국민들은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해 지금 울고 싶은 마음으로 촛불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결코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야당의 개헌 시나리오든 우리당의 ‘총선 올인전략’이든 국민들에게 피로만을 더해주는 말만 정치권에 범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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