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받는 소방관이 어디 나뿐일까”

▲ 황상호(35·가명) 소방관

공단, “소방업무와 상관없다”…법정 다툼 끝 승소
황 씨, “다른 동료 위해 선례 남기고 싶었다”
각종 부상·질환·사망 소방공무원 연 300명 ↑
공통 ‘중증 특수 질환’ 명시해 ‘당연인정’ 돼야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소방관은 국민 안전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직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올해 한 대학 연구팀이 진행한 직업관 조사에서 1위에 뽑힐 정도로 존경과 신뢰를 받는 직업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근무하는 소방공무원은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최근 5년간 공식 통계로만 연 300명 이상이 다치거나 숨졌다. 또 우울증, 신변 비관 등을 이유로 자살하는 소방공무원의 수가 순직자보다 많을 정도다. 소방공무원으로 재직 중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    order)’ 진단을 받은 황상호(35·가명) 소방관과의 이야기를 통해 소방관들이 처한 환경과 처우 등에 대해 직접 들어봤다.
 
수도권의 한 119안전센터에서 근무하는 경력 9년차 황 씨는 3시간마다 잠에서 깨는 날이 다반사다. 두통과 우울증 증세도 달고 산다. 황 씨는 2009년 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2007년 9월 임용 후 2년도 안 돼 닥친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증상은 심각했다. 더 이상 정상 근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휴직까지 냈다.
 
그는 이런 증상이 소방관 임무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확신했다. 공무원연금공단에 재해 보상 인정을 해달라는 심의 신청을 했으나 끝내 기각 당했다. 공무원연금공단은 이를 공상(공무 중 부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2010년 황 씨는 ‘외상 후 스트레스와 공무와의 인과관계’ 여부를 묻는 소송을 신청했다. 황 씨는 “공직 수행 중 다친 것이라 확신했는데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현실에 분노해 소송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너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방관 되기 전에는 이런 증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스트레스 장애는 소방관 업무 특성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소송 관련 서류
험난한 소송의 길
 
그러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공무와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화재 및 구조·구급 출동 건수가 명시된 근무 일지와 관련 사진 등 물증을 닥치는대로 모았고, 사고 현장에서 봤던 고통스러웠던 장면을 판사에게 최대한 진술했다.
 
목 매달린 시신에서부터 추락해 뇌가 흘러나온 시신,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잘려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시민 등 그동안 접했던 참혹한 모습들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일반인들은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끔찍한 상황을 수없이 봤다. 화재 진압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화마와 싸우다 근처의 드럼통을 발견했다. 통에 휘발유가 들어있다고 생각해 터져 죽는구나 생각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화재 현장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강인한 직업의식과 훈련으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몸은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현장에 투입되면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죽음에 직면한 공포와 불안을 온몸의 세포로 느낀다.
 
이 질환의 평생 유병율은 6.7%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전쟁’ 같은 현장에 수시로 노출되는 소방관은 얘기가 다르다. 소방공무원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유병율은 일반인보다 10배 이상 높다.
 
공격적 성향, 층동조절 장애, 우울증, 약물 남용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황 씨는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분노 감정조절이 잘 안 돼 대인관계까지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짧은 일화를 들려줬다.
 
어느 날 119안전센터에서 24시간 맞교대 근무 중 아침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계란 프라이가 먹고 싶었던 황 씨는 동기에게 계란 프라이를 같이 해서 먹자고 제안했다. 동기는 귀찮은데 그냥 먹자고 했다. 황 씨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내가 계란 프라이 먹겠다는데 왜”라고 따지며 동기에게 화를 냈다고 했다. 그는 “지나고 보니 내가 왜 화를 냈지?”, “진짜 별 거 아닌데 왜 그랬지?”하며 자책감과 미안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 병원 진료 내역
5년간 싸워 이겼으나…
 
황 씨는 2014년 1심에서 패소했지만 항소한 끝에 지난해 2심에서 승소했다. ‘공무로 인한 질병’이라는 판단을 얻는 데 무려 5년의 세월이 걸렸다.
 
황 씨는 화재 진압, 인명 구조, 행정 업무 등 일은 일대로 하면서 스스로 소송을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기자가 다른 동료들은 비슷한 경우 어떻게 대처하는지 묻자 그는 한 숨을 쉬며 “소송은 엄두도 못 내고 속으로 끙끙 앓는 동료가 상당하다”며 “다치면 개인보험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공상 신청을 하게 되면 오히려 ‘안전 관리가 소홀했다’는 이유로 인사고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주의·경고가 쌓이면 기관평가점수에도 불리했다”면서 “쉬쉬하며 공상 처리에 미온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밝혔다. 다만 소방관 처우에 대한 여론이 점차 좋아져서인지 지난해부터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황 씨는 “소방 근무는 3교대가 원칙이지만 119안전센터에서는 24시간 맞교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힘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다른 동료 중 한 명이 휴가·교육·출장 등으로 빠지면 사실상 2교대”라며 “하루에 17~20건 정도 될 만큼 출동이 잦은 날도 많아 업무에 부하가 걸릴 지경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5년간에 걸쳐 공단과의 싸움에선 이겼지만 병마와의 싸움에는 여전히 ‘승리’하지 못했다. 황 씨는 그동안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싸우다 지난달 7월 다시 복귀했지만 병이 또 도져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람을 살려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에 매료돼 소방관을 택했다는 황 씨는 현재 소방 유니폼을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소송에 임한 이유에 대해 “고통 받는 소방관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냐?”며 “트라우마로 힘들어 하면서도 묵묵히 일하는 동료 소방관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소송 도중 돌아가신 분도 있었다”며 “꼭 이겨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선례를 만들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황 씨만의 일 아냐
 
2015년 소방행정자료 및 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공·사상자는 총 1,629명이다. 공무 중 죽고 다치는 소방관들이 연 평균 300명 이상이다. 황 씨가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통계에 포함돼 있지도 않다. 일각에서는 이는 공식통계고 비공식으로 따지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9월 경남 산청의 한 소방관(47)은 벌집 제거를 하다 말벌에 쏘여 숨졌다. 하지만 ‘위험업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순직 인정을 못 받았다. 2014년에는 김범석(당시 31세) 소방관은 재직 도중 희귀암에 걸려 7개월 만에 숨졌지만 공무원연금공단은 ‘공무와의 연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보상 인정을 하지 않았다.
 
여론이 빗발치자 정부는 공무원 재해 보상 범위 확대·요양비 지급 절차 개선 등을 골자로 하는 공무원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 지난달 28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내용을 보면 기존에는 공무상 재해로 인정하지 않았던 암·자해 행위·정신 질환을 재해 인정 기준에 포함시켰다. 또 과거에는 소방관이 다치면 자비로 먼저 요양비를 지급한 뒤 공상 인정 심의를 통과하면 돌려받는 식이었지만 개정안에는 앞으로 국가에서 먼저 요양비를 지급하게 돼 있다.
 
▲ 119소방안전복지사업단 최인창 단장
‘기준 모호’ 한계 지적
 
하지만 전문가들은 여전히 한계가 분명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암·우울증· 자살 등 중증 특수 질환에 대해 여전히 ‘공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어야’하는데 기준이 모호하다는 반응이다. 실제 같은 내용으로 순직인정 소송을 했으나 정반대로 나온 판결이 있었다. 공단이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급성심장사와 공무와의 인과관계 여부를 묻는 같은 내용의 두 소송이 2010년 말~2011년 초에 하나는 ‘인정’, 다른 하나는 ‘불인정’으로 다르게 나왔다.
 
최인창 119소방안전복지사업단 단장은 “이번 시행령 개정이 일부 성과는 있다”면서도 “인정 기준이 구체적이지 않아 그 실효성이 여전히 의심된다”고 밝혔다. 이어 “지금까지도 개인이 해왔던 일이고 지금껏 인정을 못 해준 게 아니라 안 해주던 측면이 컸다”며 “법 범주 안에 넣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인정해 줄 리 만무하다”고 지적했다.
 
최 단장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외국 사례를 제시했다. 그는 “외국처럼 소방관이 공통적으로 걸리는 질환 3~5가지를 명시해 ‘소방관 임용 시 건강 상 문제가 없었고, 가족 병력이 없고, 5년 이상 근무했으면’ 심의 절차 없이 직업병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미국에서는 주마다 선정한 질환은 조금씩 다르지만 암·고혈압·심근경색·호흡기 질환 등을 명시해 조건에 부합하면 심의 없이 ‘당연인정’으로 다루고 있다.
 
이번 시행령 개정안에서 ‘생활안전업무’를 둘러싼 비판도 제기된다. 벌집 제거, 멧돼지 포획 등 생활안전업무는 명칭만 ‘공무 상 사망→일반 순직’으로 변경됐을 뿐 처우 개선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더민주 표창원 의원과 119소방안전복지사업단이 함께 나섰다. 표 의원은 소방관 공·사상 인정범위 확대를 위한 특례법(일명 김범석법)과 소방관, 경찰관 등 고위험 안전직군 종사자 처우 개선을 위한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이달 중순 공개토론회를 거쳐 의견수렴 과정을 거친 뒤 이달 말 입법 발의할 것으로 전해졌다. 표 의원은 “연구, 조사 등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국민의 관심을 환기시켜 최선을 다해 진행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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