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월드컵을 코 앞에 둔 지금, TV를 켜면 온통 붉은악마들과 빨간색 천지다. 지난 2002년 4강 신화를 재현해달라는 태극전사들을 향한 국민들의 염원은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이렇게 온 국민의 관심이 독일월드컵과 태극전사들에게 모아지자 일부 방송사의 드라마는 월드컵 열기를 피하기 위해 드라마의 늘리기 편성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끝났어야 할 드라마가 한 두 달 뒤로 종영이 미뤄지면서 드라마의 내용 전개상 여러 가지 폐해도 속출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시청자들의 인내심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방송사들의 무리한 ‘늘리기 편성’이 시청자들의 불만을 초래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SBS 주말드라마인 ‘하늘이시여’이다.

4차례나 연장방송 결정

당초 50회로 예정되어 있던 이 드라마는 30%가 넘는 시청률 고공행진을 계속하면서 무려 35회나 늘려 연장방송 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부터 50회->60회->75회->81회->85회 무려 4차례에 걸친 결정이다. SBS가 이렇게 7월 초까지 연장방송을 결정한 데는 후속작인 ‘연개소문’이 월드컵이 가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100부작 드라마인 ‘연개소문’은 고구려 영웅 연개소문의 일대기를 그린 SBS의 야심작. 연기파 배우 유동근이 연개소문 역을 맡아 중원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어서 벌써부터 시청자들에게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이다. 이렇게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는 대작이 월드컵의 열기에 가려질 것을 걱정하는 방송사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문제는 무리한 늘리기 덕에 황당하고 지루한 내용이 계속 방송돼 시청자들의 비난이 극에 달했다는 것. 네번의 연장방송을 하고 있는 ‘하늘이시여’는 지난달 27일 방송분에서 극의 전개와 크게 상관없는 지루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면서 시청자들의 비난이 절정을 이루었다. 이날 방송에서는 밤에 커플끼리 국수를 삶아먹고 거실에서 넘어지는 해프닝이 반복되기도 했고, 신생아를 서로가 서로에게 떠넘기는 장면을 연속으로 보여주는가 하면, 한 여주인공이 꿈속에서 인어아가씨가 되는 황당한 내용을 한편의 단편 코미디처럼 길게 보여주었다.

한 시청자는 “내용이 너무 억지스럽고, 실망스럽다”면서 “방송연장을 할 때 작가가 생각해둔 스토리가 많이 남았다고 하더니 겨우 이런 내용이냐”면서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일부 시청자들 사이에서 “앞으로 이 드라마를 안보겠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을 정도로 점점 드라마를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억지 인물과 에피소드

사실 그렇다. 방송사에서 방송을 연장할 때는 “원래 100회 분량의 드라마를 50회로 줄여서 방송했기 때문에 내용을 늘려도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충분히 많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85회로 기획된 드라마와 중후반 부분만 늘린 드라마의 맛(?)이 똑같을 수 있을까. 답은 NO. 아무리 애초 100회까지 기획됐던 내용이라도 이미 처음에는 내용 전개가 빠르게 진행되다가, 중후반에만 에피소드 등을 통해 길게 늘렸기 때문에 내용이 갑자기 지루해지고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것.

당초 50부작 예정이었던 SBS 드라마 ‘사랑과 야망’도 현재 10~30회의 연장방송을 검토 중에 있다. 지난 1987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방영됐던 ‘사랑과 야망’ 원작은 97회까지 방영됐다. 이를 50회로 줄였던 것인데,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연장방송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19일 종영된 KBS 일일드라마 ‘별난여자 별난남자’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40%에 가까운 높은 시청률을 이끌었던 이 드라마 역시 무리한 늘리기로 시청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당초 150회 방영분이었던 드라마를 170회까지 늘려 방송하면서 암 선고, 재산싸움 등으로 가족간의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끝까지 살리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경쟁작 피해가기 의혹

KBS 주말 드라마 ‘서울 1945’ 역시 70회에서 80회로, 10회를 연장 방송하기로 했다. 이에 제작진들은 당초 드라마가 100회 예정이었기 때문에 충분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다고 반기는 입장이라고 한다. 이렇듯 ‘서울 1945’의 연장방송 결정에 표면적인 이유는 제작진들이 스토리 전개상 좀 더 완결성 있는 드라마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이 사실은 후속작인 ‘대조영’ 때문이라는 것. ‘대조영’은 고구려 정신을 계승해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다. 최수종, 정보석, 이덕화, 박예진 등이 주연을 맡아 지난 3월부터 촬영에 들어간 상태다. 당초 7월에 첫 방송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재 높은 시청률을 보여주고 있는 MBC 월화드라마 ‘주몽’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

물론 ‘주몽’은 월화드라마, ‘대조영’은 주말드라마다. 하지만 이 두 드라마가 고구려를 소재로 하고 있는 대하사극이라는 점에서 먼저 시장을 선점한 ‘주몽’과 같은 시기에 방송되는 것을 피하자는 것. 이에 ‘서울 1945’ 역시 무리한 늘리기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획당시 보다 드라마를 늘리면 극중 흐름이 뚝뚝 끊기는가 하면, 필요없는 에피소드가 삽입되기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 후반부에 갑자기 등장하기도 하고, 중요해 보이던 극중 인물이 갑자기 사고로 드라마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내용의 앞뒤가 안맞는 경우도 생긴다. 한 방송 전문가는 “드라마 늘리기 편성을 주도하는 방송사의 태도는 시청률 지상주의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라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그는 “방송사들의 무리한 드라마 늘리기 편성을 줄이는 방법은 ‘드라마의 사전제작’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시청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던 SBS 드라마 ‘연애시대’, ‘불량가족’ 등은 당초 계획했던 대로 드라마를 끝맺었던 좋은 사례다. 이 드라마들은 시청자들이 오히려 연장방송을 요구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지만, ‘연애시대’ 같은 경우 사전제작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연장방송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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