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고속주행을 마치고 터널을 빠져나오자 속초와 고성의 경계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울산 바위가 나타났다. 고성 쪽에서 바라본 경관은 속초의 그것과는 또 달라 바로 액자를 씌우면 한 폭의 그림이 될 만큼 운치 있는 모습이었다. 그 풍경은 주저 없이 나를 고성으로 이끌었다.

떠나기 하루 전, 주섬주섬 짐을 꾸리는 동안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계획대로 강행할까, 다음을 기약할까. 그러다 문득 화창한 동해 바다보다 먹구름 잔뜩 낀, 약간은 우울한 동해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긴팔 옷 몇 개와 우비를 가방에 챙겨 넣고 잠을 청했다. 수도 없이 가봤던 강원도이지만 고성은 초행길. 사람 이름인 줄로만 알았던 송지호, 김일성 별장이 있는 화진포 해변 그리고 동해안 항구 중 아름답기로 유명한 가진항까지. 빗속에서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볼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했다.

눈부신 햇살에 특별한 추억을 쌓으려 했던 내 꿈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비 갠 다음 날에만 볼 수 있는 새하얀 뭉게구름이 여행 내내 나와 동행해주었다. 보통의 여행에서는 도착하자마자 안내책자를 구해 그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명소, 8경 혹은 10경이라 불리는 곳들을 찬찬히 보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고성 여행만큼은 미리 챙겨놓은 안내서를 가방 깊숙한 곳에 넣었다.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을 무작정 할 작정으로.

고성이 준 특별한 선물, 송지호 해변

고성에는 동해안을 따라 26개의 해변이 펼쳐져 있다. 송지호 해변은 깨끗한 백사장과 동해의 많은 해수욕장과는 다른 얕은 수심으로 여행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제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보통 협재 해변을 보고 시각적인 놀라움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국적인 에메랄드 빛 물과 백사장을 가진 바다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서다.


고성에서는 아니 동해에서는 송지호 해변이 바로 그런 곳이다. 속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하늘을 닮은 맑은 물, 해변 맞은편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죽도 그리고 햇빛에 부딪혀 반짝이는 고운 모래. 파도마저 잔잔히 거슬러 올라와 발등을 간질인다. 해변에는 색색의 텐트와 파라솔들이 앙증맞게 모여 있다.

송지호 해변에 조성된 오토캠핑장에서는 가족, 친구 와 함께 시원한 동해 바다를 한눈에 담으며 캠핑을 즐길 수 있다. 청량한 파도소리가 텐트 안까지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다. 텐트마다 조명을 켠 오토캠핑장의 밤 풍경은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주변에는 둘레가 약 6km, 수심이 5m에 달하는 송림이 울창한 자연 호수인 송지호가 있다.

해질녘 호숫가를 산책하며 이곳에 서식하는 철새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송지호를 한 번 방문한 사람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와 한적한 매력에 빠져 꼭 다시 찾게 된다.

발길 닿는 대로, 시선 머무는 대로 왕곡마을

아무래도 고성에 오면 송지호를 여러 번 지나치게 된다. 고성 여행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을뿐더러 숙소나 맛집, 볼거리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왕곡마을 역시 송지호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한옥마을이다. 동해의, 특히 고성의 맑은 바다를 그리며 달려온 여행객들에게 왕곡마을은 한옥체험이라는 신선한 재미를 더해준다.


19세기 전후에 세워진 북방식 전통가옥이 고즈넉하게 들어서 있고, 소박한 초가집들은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다. 지금도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하며 농사도 짓고 한과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오래 전 어느 하루처럼 그들은 밭에 씨를 뿌리고, 논에 물을 주고, 야참을 챙기는 사이 나는 카메라를 들고 조용히 셔터를 누른다. 가을바람 선선히 부는 어느 날 무작정 달려와 대청마루에 누워 그들 속에 파묻히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꿈꾸던 모든 한적함, 화진포

송지호를 나와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동해안 최대의 자연호수인 화진포가 있다. 화진포는 조성 과정이 특별하다. 강물에 실려 온 모래가 바닷물에 부딪혀 하구에 쌓이기를 거듭해 이룬 모래톱이 가늘고 길게 바다 쪽으로 뻗어서 그 안에 호수가 조성됐다고 한다.


화진포라는 이름은 둘레 16km나 되는 호숫가에 해당화가 만발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듯 신비함을 담고 있는 바다와 호수 사이에 발그레 얼굴을 붉힌 해당화가 만발했다.

찔레꽃보다 덜 달고 은은하게 풍기는 해당화 향이 바람을 타고 저 멀리까지 퍼진다. 그 향을 지나치기가 쉽지 않아 천천히 호숫가를 걷기로 했다. 가을 느낌 물씬 풍기는 넓은 갈대밭이 펼쳐지고, 간간히 철새들이 그 위에 내려앉는다. 겨울에는 천연기념물인 고니 등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와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별’들의 휴양지

화진포에는 ‘별’들의 별장이 3곳이나 있다. 아마도 바다와 호수 그리고 산, 삼박자를 고루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절경이 빼어나기까지 한 이곳을 그들은 진작 알아봤으리라.

우선 화진포의 성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주차장으로 들어가면 일명 김일성 별장이라 불리는 화진포의 성과 이기붕 부통령 별장을 볼 수 있다.

▲ 김일성 별장

화진포의 성은 당초 선교사 셔우드 홀 부부에 의해 1938년 화진포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그야말로 ‘성’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이다. 이곳을 1948년 김일성이 가족들과 함께 여름 휴양지로 약 3여 년간 사용했고 그 후로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고 있다.

화진포 해변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중턱에 놓인 어린 시절 김정일의 모습은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전면 창문으로 되어 있는 2층의 전경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 창 밑에 안락의자 하나를 놓고 앉아 있으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김일성 별장에서 내려와 해변을 끼고 3분 정도 걸으면 화진포 호수 쪽으로 위치한 이기붕 부통령 별장이 보인다. 이 역시 1920년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돼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로 휴전 후 부통령이었던 이기붕 부통령의 부인 박마리아 여사의 개인 별장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기붕 부통령 별장
외국인 선교사가 지었음에도 마치 한옥을 닮은 듯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이다. 호수 저편에 놓여 있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으로 가려면 다시 차를 타야 한다.

이승만 별장은 그야말로 ‘명당’ 자리에 지어졌다. 세 곳의 별장 중 내부도 가장 넓고 화려하다. 남녘땅 북쪽 끝인 이곳 고성에서 ‘별’들의 멋진 별장들을 돌아보고 있자니 새삼 분단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단절의 아픔이 가득한 우리네 역사와 힘들었던 삶들을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
▲이승만 별장 내부
잠시 쉬어가기 좋은,
청간 해변

이름이 특이해 기억에 남는 아야진 해변을 지나는 길에 청간 해변을 만났다.

‘동해의 새벽 바닷길을 여는 아야진항’이라고 벽에 정성들여 예쁘게 새겨진 모습을 보니 잠시 차를 멈추고 싶어졌다. 때로는 이런 즉흥적인 여행에서 숨은 보석을 발견하기도 하니까. 아야진항을 따라 이어진 청간 해변에 도착한 첫 느낌은 보통의 동해 바다였다.


그래도 왔으니 해변도 거닐 겸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모래의 느낌은 달랐다. 엄밀히 모래가 아니라 작은 모래알갱이 같다고 할까. 발에 달라붙지 않아 손으로 털면 쉽게 털린다. 어스름 해가 넘어갈 때라 맥주 한 캔을 집어들고 모래 위에 앉았다.

햇살에 부딪혀 반짝반짝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잠시 쉬기로 했다. 동해의 특성상 바다를 집어삼킬 듯 온 세상을 붉게 만드는 일몰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잔잔히 어둠이 깔리는 모습이 좋다.

숨은 보석을 찾은 이 기분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청간 해변을 전망으로 한 럭셔리 부띠끄 빌라와 전망 좋은 카페를 가진 스파 리조트가 이미 자리를 잡고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강원도에서도 특별히 아름다운 고성의 해변들과 고성 8경 중 하나라 불리는 청간정 사이에 있어 초행자들에겐 그저 이름 모를 해변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청간은 오늘부터 나에게 잠시 쉬어가기 좋은, 그런 해변이 됐다.

좋잖아요, 여기.
김하인 Art Hall

소설 ‘국화꽃 향기’는 암에 걸린 한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사랑의 의미와 생명의 소중함이 점점 퇴색돼 가던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 준 소설로 당시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설의 작가인 김하인 씨가 2008년 큰 도로에서도 한참을 들어와야 하는 강원도 고성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 김하인 Art Hall을 열었다.

펜션, 작은 도서관, 도예 체험 공간 그리고 카페로 이루어져 규모는 꽤 크지만 모습은 꾸밈없이 수수하다.

주황색 지붕을 한 지중해풍 건물과 파란 하늘, 쪽빛 바다가 잘 어우러지는 이곳. 바로 앞 자작도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마당 한쪽 테라스 위에는 팥빙수 한 그릇을 도란 도란 나누어 먹는 연인이 있었다.

이곳을 들러 간 어느 여행객이 김하인 작가에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 고향은 경북이시면서 왜 이곳 고성까지 오셨어요?”, “좋잖아요. 여기...” 나도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역시, 우문현답이다.

<프리랜서 김송은 기자>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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