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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참모부 지시로 개전 직전 38도선 정찰

한국전쟁(韓國戰爭) 개전 이튿날인 1950년 6월 26일 북한(北韓) 주재 소련대사 테렌티 포미치 슈티코프 중장은 모스크바의 소련군(蘇聯軍) 총참모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총참모부의 지시에 따라 소련 군사고문단이 (북한군과 함께) 6월 12일부터 23일까지 북위 38도선에 병력을 집중하고 지형을 정찰(偵察)하는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음…”(러시아국방부중앙문서고. 자산번호 23. 목록번호 173346. 문서번호 195. 8-10쪽)

이 전문은 한국전(韓國戰) 개전 당시 소련군이 단순한 북한군(北韓軍)에 대한 교육임무나 자문역할에 머물지 않고 남침(南侵)준비에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동안 공개된 러시아(Russia) 문서(文書)들에서는 소련군 병력(兵力)이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한 시기가 중공군(中共軍)의 참전 직후인 50년 11월 제 64비행단이 만주지역에 배치되면서부터로 간주되어 왔다. 또 스탈린(Joseph Stalin·1878~1953)은 한반도에서 미·소(美蘇) 양국군이 철수한 이후 약간의 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켰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전 이들을 모두 불러들인 것으로 돼 있었다. 6.25 개전(開戰) 직전 북한군에 배속돼 남침(南侵)준비에 참여한 소련 군사고문단의 숫자는 대략 1백 50명선.

개전 직전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바실리예프 소장은 총참모부에 보내는 50년 3월 15일자(字) 전문에 이렇게 기록(記錄)하고 있다.

“3월 1일 현재 북한군에 배속된 소련군 고문장교는 1백 48명임. 북한군 편제표에 따르면 소련군 고문장교의 숫자는 2백 39명이기 때문에 91명의 장교가 부족한 실정임…”

이 문서는 오히려 소련군의 고문장교의 숫자가 부족해 쩔쩔매는 상황을 그려보이고 있다.

이 밖에 군사고문단과는 별도로 북한에 머물면서 전쟁준비를 지원한 군사전문가나 군속(軍屬)의 숫자는 4천명을 넘어선다.

당시 군사전문가 잔류상황은 소련군 총참모부의 49년 2월 18일자 보고서 ‘군(軍) 철수이후 잔류인원’에 “총 4천 2백93명이 북한에 남아있음. 그중 4천 20명은 군인이고 나머지 2백 73명은 군무원임”으로 기록돼 있다. 이 군사전문가들은 평양(平壤)의 소련대사관은 물론 평양과 청진(淸津) 등 3개 위수비행단과 청진, 나진(羅津)의 해군기지를 비롯한 북한 전역의 군부대, 중요시설에 배치돼 군사기술을 이전하거나 군 작전에 직접 참여하면서 개전 때까지 북한에 머물렀다. 문제는 이들이 개전 직전 완전히 북한땅에서 철수했는지의 여부.

러시아 국방부가 소련 군사고문단의 활동과 관련해 내린 작전명령에 따르면 이들은 숫자상의 변동이 있었을 뿐 북한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러시아 국방부는 우선 50년 5월 16일자 명령과 같은해 11월 29일 명령에서 군사고문단과 교관의 숫자를 2백 46명으로 유지토록 지시하고 52년 2월 15일에는 1백62명, 53년 5월3일에는 1백52명을 주둔시키도록 명령을 하달한다.(러시아국방부 중앙문서고. 문서번호 73. 42-1백20쪽)

물론 이들 소련 군사고문과 기술진은 한국전 발발이후부터 종전(終戰)때까지 미국(美國)과의 교전(交戰)을 기피한 스탈린의 엄격한 지시 때문에 북위 38도선 이남으로 내려가거나 전투중인 군대에 머무는 것이 철저히 금지됐다.

이렇게 소련군이 한국전 개전 초기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산 김일성(金日成·1994년 사망)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숨을 돌린 시점인 51년 10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달아 76명의 소련군 장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게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대미(對美)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을 책임감있게 지원해준 소련기구(軍)의 공을 높이 평가해 헌신적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한 소련軍 고문들에게 훈장을 수여키로 결정했다…”(라주바에프 중장이 총참모부에 보내는 51년 11월 7일자 전문)

이때 전문발송자가 라주바예프 중장으로 바뀐 것은 슈티코프대사(현역중장)와 군사고문단장 발시리예프 소장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이 패퇴한 50년 말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라주바예프중장으로 전격 교체됐기 때문이다. 슈티코프대사는 본국으로 송환돼 51년 2월 3일 소장으로 강등됐으며 열흘 뒤에 예편(豫編)되는 불운을 맛보았다. 스탈린 사후인 56년 2월 8일 소련 각료회의의 결정에 따라 슈티코프는 중장으로 복권(復權)된다.

전쟁 중반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소련군 수뇌부는 군사고문단과 전문가의 숫자를 축소키로 결정했으며 휴전회담이 성사단계에 이르자 참모총장 바실리 소콜로프스키 원수는 휴전협상 조인 이틀 전인 7월 25일 북한대사 겸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낸다.

“휴전회담 체결 시 북한군에 잔류하는 소련군이 없도록 하기 위해 한반도에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 인원은 휴가처리할 것”

주로 북한땅을 무대로 활동한 이들 군사고문단과 군사전문가 외에 만주땅에 기지를 둔 제 64비행단은 보다 대규모로 활동한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다. 제64비행단은 50년 11월부터 53년 6월까지 활동하면서 시종 2만6천명 수준의 병력을 유지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전 참전으로 사망한 소련군의 숫자는 2백99명(장교 1백38명(비행사 1백20명포함), 사병 1백61명)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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