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억 들인 부산국제영화제 “비난 봇물”

팔순이 가까운 노인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수 십 년 간 우리나라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는 마니아들이 그의 방한을 기다렸다. 드디어 지난 2일 저녁 8시 45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 엔니오 모리꼬네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시간여동안 눈물을 흘린 사람도 많았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10분여가 넘는 기립박수로 청중들은 그를 보내 주려하지 않았다. 이날 공연엔 암표상도 없었다. 암표상들이 오히려 관객들에게 표를 사서 입장하는 모습도 연출됐다. 왜냐하면 세계최고 음악거장의 내한공연은 처음이었고,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영화음악의 최고봉, 살아있는 영화음악의 전설, 다섯 번이나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올랐고 올해 초엔 아카데미 평생 공로상을 받은 엔니오 모리꼬네다. 그런 그가 당초 참석하기로 한 부산영화제의 개막식에만 참석하고 예정된 행사에 모두 불참한 채 출국해버렸다. 왜 갑작스러운 행동을 보였을까. 현재 부산국제영화제는 모리꼬네의 출국으로 맹비난을 받고 있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박찬욱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영화보다 더 유명한 영화음악을 만들어낸 세계적인 거장이다. 지난 61년에 데뷔해 ‘황야의 무법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언터처블’ ‘시네마천국’ ‘벅시’ ‘사선에서’ ‘오페라의 유령’ 등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음악을 만든 거장이다.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인 사라브라이트만의 경우 그의 작품인 가브리엘 오보에를 부르기 위해서 2달에 한 번씩 편지를 써서 3년 만에 허락을 받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말은 현실이 됐다. 그런 그를 그동안 정말 몰랐던 셈이다.


정치인이 레드카펫 주인공
대선후보들 유세장 방불


부산국제영화제의 의전을 맡은 진행요원들이 몰랐고, 부산국제영화제의 품위와 영화에 대한 기본상식이 없었던 차기 대선주자들도 몰랐다. 진행요원은 사진에 응하기 위해 포토월에 선 고령인 엔니오 모리꼬네를 빗속에서 떨게 했으며, 그의 부인의 손을 거칠게 붙잡고 행사장에 빨리 입장할 것을 재촉했다. 진행요원은 그저 그런 예술영화감독이나 아니면 영화 관계자 정도로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거장인 그를 몰랐다하더라도 기본적인 매너나 상식 이하의 의전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VIP 자격으로 참가한 그는 상당히 오랜 시간 정처 없이 복도에서 방황했다.

이탈리아어 통역이 동행하지 못했고, 영화제 측에서 미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영화제측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가 빗속에서 떨면서 사진을 포즈를 취하고 떠밀리듯 내려온 레드카펫엔 이명박 한나라랑 대선 후보가 수 십 명의 경호원을 수행한 채 화려한 입장을 했고,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도,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도, 그 자리를 점령했다.

뿐만 아니다 VIP룸에는 정치인들이 몰려와 북적였다. 개막파티에 그가 피로감으로 불참하자 이명박 후보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20여명의 수행원을 대동한 이 후보가 행사에 참석하자 플래시 세례가 터졌고, 국내 영화인들 몇 명은 악수하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다. 이 후보는 와인잔을 들고 마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날 행사에 참석한 영화인들과 해외 영화인들을 조용한 침묵을 지켜야했다.

다음날 모리꼬네는 귀국했다. 그가 떠난 뒤 국내 영화계는 세계적인 망신을 자초했다며 여기저기서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제적인 망신을 스스로 자처했다는 자조 섞인 반성이 나온 뒤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80억원의 예산, 64개국에 선정된 275편의 영화가 소개되며 국제적인 행사로 거듭나고 있는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 오랜 시간 준비해온 영화축제가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행동과 주최 측의 무성의한 진행으로 엉망이 돼 버렸다. 다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축하공연 무대의 주인공으로 초청된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이 엔니오 모리꼬네를 위해 연주한 헌정 공연만이 귓가에 맴돈다. 2007 부산국제영화제. 누구를 위한 행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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