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가파 방송, 이대로 괜찮은가?

방송의 표현수위가 도를 넘어섰다. 지상파 방송에서 욕설이 나오고 케이블 채널에선 낯 뜨거운 장면과 ‘삐’ 소리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최근 방송위원회에서 일부 프로그램에 대한 중징계를 내렸지만 막가파 방송은 근절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시청률 잡기에 급급한 나머지 본질을 잃어버린 방송. 그 현주소를 되짚어 본다.


“나이 쳐 먹고 뭐하는 짓이야. 정신 차려. 이 XXX야!”

지난 10월 13일. 저녁을 먹으며 가족들과 SBS 오락프로그램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이하 <라인업>)>을 보던 주부 유정순(부산·43)씨는 아연실색했다. 지상파 방송에서 욕설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문제의 장면은 <라인업>의 한 코너에서 등장했다. “욕톤이 좋다”는 김용만의 칭찬(?)에 김구라가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절친한 개그맨 선배 김경민에게 “정신 차려. 이 XXX야!”란 욕을 퍼부은 것. 당시 욕설은 음향처리가 됐으나 자막에 특정 동물 그림이 들어가 방송을 본 사람은 누구나 어떤 욕인지 짐작할 수 이었다.

유씨는 “너무 놀랐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함께 보고 있었는데 당황했다”며 “공중파에서 그것도 온 가족이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주말에 그런 방송을 하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불쾌감을 나타냈다. 방송 후 <라인업>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유씨와 같은 감정을 느낀 시청자들의 항의 글이 쏟아졌다. 편집 가능한 녹화방송에서 욕설 장면이 나왔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불만은 더욱 컸다.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라인업> 제작진은 방송 이틀 뒤인 10월 15일 오후, 홈페이지 게시판에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다. 제작진은 “출연자가 부적합한 언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감을 살리려는 제작 의도가 지나쳐 효과음 삽입 및 묵음 처리해 방송하게 됐다”며 “이로 인해 프로그램을 통해 즐거움을 기대했던 시청자 여러분께 적지 않은 불쾌감을 드리게 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사과를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시청자는 많지 않은 듯하다. 사과문 게재 후에도 일부 시청자들은 욕설 방송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무한도전> 이후 막가파 방송 인기

MBC 오락프로그램 <황금어장>의 코너 ‘무릎팍 도사’와 ‘라디오 스타’역시 막말 방송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김구라, 신정환, 윤종신 등이 출연해 아슬아슬한 입담을 겨루는 ‘라디오 스타’의 경우 최근 김국진이 메인 MC로 가세, 다른 출연자의 멱살을 잡는 행동으로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비단 <라인업>과 <황금어장>만이 아니다. 정도만 다를 뿐 최근 방송 3사의 각종 오락프로그램은 하나같이 막가파 방송을 하고 있다.

이런 방송이 유행하게 된 중심에는 MBC 간판 오락프로그램 <무한도전>이 있다.

유재석, 박명수, 정형돈, 하하, 노홍철, 정준하가 출연하는 <무한도전>은 국내 최초로 ‘리얼서바이벌쇼’를 표방, 틀을 깨는 진행과 멤버 여섯 명의 꾸밈없는 모습으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상대방을 마구 꾸짖는 박명수의 ‘호통개그’와 다른 멤버를 구박하고 서로 다투는 스타일의 개그는 <무한도전>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인기 원동력이다. 자막오류, 욕설방송 등으로 방송위원회로부터 2번의 권고를 받았음에도 <무한도전>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이후 등장한 대다수 오락프로그램이 <무한도전>과 비슷한 형식으로 진
행되고 있다.

토크쇼와 라디오도 막말 방송의 구성원이다. SBS 토크쇼 <야심만만>과 외국인들이 출연하는 K-2TV 토크쇼 <미녀들의 수다>에서는 거의 매회 출연진들의 파격 발언이 쏟아진다. 윤종신의 경우 자신이 진행하는 MBC FM4U 라디오 <2시의 데이트>에서 여성을 ‘생선회’에 비유, 여성들의 질타와 방송위원회의 ‘시청자에 대한 사과 조치’ 징계를 받았다.


케이블채널 선정성 극에 달해

지상파보다 규제가 약한 케이블채널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색다른 재미를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친 말과 자극적인 화면을 쉴 새 없이 등장시킨다. 특히 지상파에서는 할 수 없는 선정성 짙는 프로그램이 다수 제작, 방송되고 있다.

최근 상황을 보다 못한 방송진흥위원회가 결국 칼을 빼들었다. 일부 케이블·위성TV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들에 대한 중징계를 내린 것.

방송위원회는 지난 16일 열린 전체회의에서 tvN의 <위험한 동영상 sign>과 <독고영재의 현장르포 스캔들>, Mnet의 <아찔한 소개팅3>, 온게임넷 <포커스 온 스타리거>, 현대홈쇼핑의 <미용> 등 5건의 프로그램에 제재조치를 의결했다.

방송위에 따르면 <위험한 동영상 sing>은 재연방송임에도 다큐멘터리 기법을 차용하고 낙태, 유괴 등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신중을 기하지 않았다. 특히 그동안 동일 사안으로 수차례 제재를 받았음에도 재발한 점을 고려, ‘시청자에 대한 사과’ ‘해당 방송프로그램의 중지’ ‘해당 방송프로그램 관계자에 대한 징계’ 등 세가지 중징계 조치를 내렸다. <독고영재의 현장르포 스캔들> 역시 부도덕한 남녀관계를 묘사하고 욕설과 비속어 사용이 빈번해 ‘시청자에 대한 사과’와 ‘해당 방송프로그램 관계자에 대한 징계’를 받았다. 시즌 1부터 여성 비하, 외모지상주의 조장 등의 논란을 일으켰던 Mnet <아찔한 소개팅3>에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와 ‘해
당 방송프로그램 중지’ 명령이 주어졌다.

이 외에 온게임넷의 <포커스 온 스타리거>와 현대홈쇼핑 <미용>은 각각 ‘경고’와 ‘주의’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이같은 방송위의 징계로 막가파 방송이 줄어들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처벌이 너무 가벼워 실효성이 적기 때문.

실제 지난 18일 열린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선정적인 케이블방송에 대한 방송위원회의 솜방망이 처벌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은 “방송위의 선정성 관련 제재는 2005년 22건, 2006년 19건, 2007년 현재까지 23건”이라며 “심의 규정이 허술해 방송위가 제재조치를 취하는 한계가 있고 방송위가 이마저도 잘 활용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시청률 얻으려 막간다?

한편 극에 달한 시청률 경쟁 때문에 막가파 방송은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편에서 살아남으려면 시청률이 좋아야하고 이를 위해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

방송관계자 A씨는 “케이블채널 수가 늘고 이들의 자체제작 비중이 증가하면서 시청률 경쟁이 더 심해졌다”며 “오락프로그램의 경우 피 말리는 시청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다소 자극적이란 말을 듣더라도 화제를 모으고 관심을 받아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시처청자들이 강한 개그에 익숙해져 있어 이제는 웬만한 강도로는 먹히지도 않는다”고 덧붙였다.

케이블채널도 상황은 마찬가지. 케이블채널의 경우 지상파 방송과 차별화를 두려다보니 자연스레 자극적인 요소를 다루게 되는 경우도 많다.

모 케이블방송의 연예프로그램 PD는 “같은 연예 분야라도 방송 3사와 다른 소재를 찾다보니 다소 위험한 이야기를 다루게 되는 것 같다”며 “비슷한 프로그램이 많아져 경쟁이 더 치열해진 것도 방송을 자극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는 지상파를 보다가 잠시 케이블채널을 돌려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잠깐 머문 시청자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선정적인 장면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방송은 시청률보다 유익한 정보전달과 공익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방송관계자 B씨는 “시청률도 좋지만 요즘의 방송, 특히 오락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방송의 본질이 사라진 느낌이다”며 “오락프로그램 연출진의 자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청자 박찬미(경기도·32세)씨도 “7살 난 딸과 별 생각 없이 오락프로그램을 보다가 민망해지는 경우가 많다”며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오락프로그램이 생겨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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