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와 파우더 블루 그리고 비취와 파스텔 블루의 물이 태어난 곳, 지중해. 그러한 바다에 마치 나풀거리는 꽃잎처럼 자그맣게 내려앉은 몰타. 몰타는 지중해 한가운데에 그렇게 고요하게 있다.

몰타, 우리에게는 아직 꽤 생소한 이름. 어딘지 남태평양에 뚝 떨어져 있을 법한 느낌도 있지만 몰타는 지중해 한가운데, 이탈리아반도 끝에 있는 시칠리아섬에서도 100여 킬로미터 아래에 있는 제주도의 1/6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파란 하늘 아래 그리고 그보다 더 파란 바다는 여행지뿐 아니라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가장 화사하게 돋보이는 곳이기도 해 최근 부쩍 신혼여행을 떠나오는 커플들이 많아졌다. 이제 몰타가 아직 보여주지 않은, 조심스럽게 숨겨놓은 진짜 지중해식 프로포즈를 받을 차례. 그 파란 몰타식 청혼.

몰타까지 가는 직항이 없었기에 터키를 경유했다. 대기하는 시간, 터키 항공 라운지의 푹신한 소파에 기댄 채 이스탄불 동쪽에서부터 밝아오는 새벽의 하늘을 보았다.
묽은 잉크처럼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던 하늘은 이제 곧 마주할 몰타의 하늘과 바다, 딱 그것의 밑그림이었다. 아침이 밝았고 터키의 이스탄불을 떠난 비행기는 세 시간이 지나 드디어 몰타의 활주로에 내렸다. 비스듬히 기울기를 낮추던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지중해와 몰타의 건물 모습들이었다.
 
은은하되 무겁지 않고 연약하되 쉽게 날아가지 않는 이곳을 지나간 시로코 바람,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로 불어오는 바람이 남겨놓은 색. 그 라임스톤의 색은 이탈리아와 아랍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나라들에서 조금씩 보았던 것들이었다.

올드 시티 & 빅토리아 요새, 쓰리 시티즈

쓰리 시티즈라는 곳을 몰타의 첫 방문지로 삼았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 반대편에 있는 호스피구아, 생글레아 그리고 비토리오사라는 세 지역으로 구성돼 있는 쓰리 시티즈. 닻을 내린 채 잔잔한 바다 위에서 쉬고 있는 고급스러운 요트들과 큰 선박이 드나드는 그랑항과 슬리에마 선착장이 있는 곳이다.

한가롭게 항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지만 사실 몰타의 역사는 모두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육지와 바로 맞닿은 바다가 깊어 북아프리카와 아랍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등 수많은 나라들이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몰타를 차지하기 위해 이 항구를 통해서 들어왔고 또 사라져 갔다. 몰타는 수많은 나라들의 거센 도전과 침략을 받아왔지만 결국, 이렇게 현재 몰타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남아 있다.

항구 뒤편으로, 부드러운 라임색으로 뒤덮인 올드 시티로 올라가 본다. 올드 시티 끝에는 몰타에서 가장 오래된 요새인 빅토리아 요새가 있다. 그랑항이 블루와 화이트의 세상이라면 올드 시티 전체는 라임스톤의 세계다. 고운 모래를 발라놓은 것 같기도, 얼핏 별 무리 속의 은하수처럼도 보이는 라임스톤의 고운 벽에는 어딘지 마음을 놓게 만드는 따뜻한 온도가 숨어 있다.

몰타에는 앞으로도 100년 이상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의 석회석이 땅에 묻혀 있다고 한다. 골목을 거닐다 벽에 박힌 한 사진을 보게 됐다. 여인의 얼굴이 새겨진 타일에는 그녀를 추도하는 십자가와 글귀가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할머니 두 분이 설명을 도와준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허락되지 않아 자신의 집 2층 창문에서 몸을 던졌다는 로맨틱과 비극의 사이. 2층은 떨어져 생을 달리할 만큼의 높이는 아니지만 그녀가 마음을 먹고 독하게 던진 그 높이는 아마 그녀가 완성할 수 없었던 사랑의 거리만큼 멀었을 것이다.

은은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갤러리가 보였다. 골목과 갤러리. 이 이상적인 조합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마침 그림을 그리고 있던 화가는 낯선 이방인을 환하게 맞아주었다. 그는 항구에서 바라보는 올드 시티와 북부 몰타에서 볼 수 있다는 해바라기, 그리고 지중해를 주로 그려낸다고 했다.
 
촉수 낮은 전등 빛 아래였지만 그 그림들에서는 이상하게 빛이 났다. 화가와 인사를 나누고 다시 골목으로 들어서며 올드 시티를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투박하게 이어진 바닥의 돌을 밟았고 상대방의 배려가 숨어 있는 유난히 낮은 계단을 내려왔다. 올드 시티를 나오며 든 생각은 어쩌면 이 골목과 갤러리에서 몰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미리 본 것은 아닐까 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화가의 미소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몰타 사람들의 향기, 마사슬록 어촌마을
 
몰타가 당한 침략의 역사는 동남부 끄트머리에 있는 마사슬록에서도 이어진다. 15·6세기 터키군과 나폴리군의 격전지였다는 마사슬록, 현재는 몰타 최대의 어촌마을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됐다.
그랑항에서처럼 화려하고 눈부신 고급 요트들을 볼 수는 없지만 알록달록한 무지갯빛을 가진 몰타의 전통 배 루츠가 잔잔한 바다 위에서 쉬고 있는 모습은 어쩌면 마사슬록을 넘어 몰타 전체를 대표하는 그림이 될지도 모른다.

몰타 최대의 수산 시장인 마사슬록의 선데이마켓은 매주 일요일 아침 여덟 시부터 일찍 열리며 오후 세 시면 파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한다. 벼룩시장도 함께 펼쳐져 몰타 사람들과 여행객들 사이에서 진짜 몰타 사람들의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마사슬록. 게다가 바다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 마사슬록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 곳이 좋아졌다.

일요일이 아닌 경우 마을은 꽤 한적하다. 루츠뿐 아니라 마사슬록 집들의 문들은 화려하고 강렬한 대비의 원색으로 유명한데, 그것은 색깔로써 집을 구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의 외형을 문패나 다른 도구가 아닌 색으로 구분하는 사람들. 비록 그것이 문맹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아름다운 아이디어이며 일상 속에서 피워낸 예술과 가까운 삶의 방식이었다.

할아버지들은 그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일상을 나누고 아침부터 마시던 맥주 캔을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던진다. 아무도 그런 행동을 무어라 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깨끗한 마사슬록 거리이기에 그 쓰레기는 분명히 그 할아버지가 다시 주워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배 손질을 하는 어부의 표정에는 딱히 노동의 곤고함이 어려 있지 않고 기념품을 파는 수더분한 아주머니의 호객에는 먼저 몰타에 온 환영의 인사가 담겼다.

다소 세련된 모양은 아니지만 앞치마를 사고 기념품도 샀다. 잔돈을 건네주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던 아낙. 그것은 어제 쓰리 시티즈를 걸으며 말티즈-몰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얼굴의 주름을 통해 이미 보았던 것이다. 섬나라 특유의 배타적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몰타 사람들의 친절함은 원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침묵과 고요의 도시, 엠디나
 
엠디나는 몰타의 첫 번째 수도로 몰타섬 중앙의 언덕 지대에 위치한 중세의 성채 도시다. 발레타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져 있으며 한 CF에서도 배우 현빈이 이곳을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몰타섬의 장쾌한 풍광은 어째서 오랫동안 이곳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지역이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이런 풍경 속에서 사랑을 나누지 않는 것은 엠디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연인들은 여기저기서 입을 맞추고 가만히 서로를 안은 채 상대의 눈을 바라본다. 물론 그 눈에는 엠디나와 엠디나 너머로 보이는 몰타의 전부가 들어있을 것이다.

엠디나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는 까닭에 함부로 건물 외관을 변경하거나 훼손할 수 없어서 옛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유럽 전역을 뒤덮고 있는 그라피티 또한 이곳 몰타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엠디나의 입구로 들어서면 중세의 앤티크한 기운이 온 공간을 가득 채운다. 별다른 장식 없이도 말이다.

몰타의 골목들은 유난히 좁고 길지 않으며 금방 다른 골목으로 꺾어진다. 작은 자동차도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크기이며 어떤 골목은 성인 남성이 두 팔을 벌리면 꽉 들어차는 골목도 있다. 이는 적들의 침입에 대비해 일부러 디자인 한 것으로 적들이 쏜 화살이 길게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말도 빨리 달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새 엠디나의 중심인 세인트 폴 성당이 나왔고 조금 전에 마주쳤던 사람과 모퉁이에서  다시 만난다. 그 사람은 나를 지나쳐 또 나와 만났던 다른 사람과 가볍게 눈인사를 나눌 것이다. 돌에서 묻어나오는 세월의 흔적 그리고 그 골목 사이로 불어오는 언덕의 미풍.

어쩌면 쓰리 시티에서처럼 몰타에서 남은 느낄 것들을 먼저 다 경험해 버린 것 같은 묘하고 아이러니한 불안함. 이곳에 밤이 찾아오고 라임스톤의 벽에 가스등 불빛이 물든다면 어떨까. 벌써부터 기회가 된다면 하루 종일 있으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오로지 이곳저곳을 걷고 싶은 곳이 돼버렸다.

상업적인 간판이나 관광객들을 위한 시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몰타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판다는 작은 폰타넬라 빵집과 화려하지 않은 소박한 레스토랑이 있고 크지 않은 기념품 가게가 있을 뿐. 이곳은 그냥 몰타 사람들이 다니는 작은 길, 그것뿐이었다. 골목 하나마다 적당한, 그러니까 넘치지 않는 몰타만큼의 감사를 하게 되는 곳. 이곳은 몰타의 엠디나라는, 더없이 한적한 골목의 완성.

지중해를 만지다, 블루 그로또

몰타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동굴, 블루 그로또. 블루 그로또는 ‘푸른 동굴’이라는 뜻으로 절벽을 따라 형성된 크고 작은 해식 동굴을 일컫는다.

이탈리아 카프리섬에 ‘절대 빛깔’이라고 불리는 같은 이름의 동굴이 있지만 혹자는 몰타의 블루 그로또 또한 몰타의 또 다른 랜드마크라고 부르는 데 주 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몰타를 대표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곳.

블루 그로또로 가기 위해 몰타섬의 남서쪽으로 향했고 하늘은 마침 맑았다. 그동안 몰타의 바다에 집중하느라 하늘을 보지 못했었는데 지중해 위에 떠 있는 하늘은 그리스와 이탈리아 남부의 그것처럼 여전히 아름답다.

투어는 열 남짓의 사람을 태우고 삼십여 분 동안 진행된다. 바다로 들어선 이후 보트는 섬 바깥을 크게 돌아 처음 동굴이 보이는 곳에 선 후 다른 동굴들을 하나씩 탐험한다. 그 중 가장 큰 동굴을 지칭하는 블루 그로또.

잠시 동굴에 들어선 순간, 마치 사파이어 궁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온 몸을 감싼다. 사람들은 중심이 잡히지 않는 어정쩡한 자세에서도 기꺼이 몸을 일으켜 사진으로 담아낸다.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면이기에. 동굴 안은 의외로 파란 색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햇빛이 바다를 투과하면서 얕은 바닥에서 반사된 영롱한 빛이 투영돼 초록색으로도 보였다가 가끔은 짙은 자수정색처럼도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물에 반사된 빛은 은색으로도 빛났다. 선착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파도를 타던 배가 출렁이며 잠시 지중해의 물을 만져볼 수 있었다.
물은 돌고래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처럼 미끌거리기도 했고 잘 자란 잔디를 스치는 것 같기도 했다. 지중해를 눈에 그리고 마음에 담았던 순간, 블루 그로또는 그렇게 손에도 남는다.

보트 운행시간 여름 9:00~17:00 겨울 9:00~15:30 투어 가격 성인 8유로, 어린이 4유로.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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