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개입 직후 수풍댐 공격 고려

히로시마급 투하 시 댐 파괴 판단

미국은 중공군 개입 직후 수풍댐 원폭 공격의 가능성을 모색하는가 하면 1952년 말에는 실제 원폭 투하가 가능한 전폭기들을 미(美) 극동군사령부에 특별 배치시키는 등 한국전에 원폭을 사용하는 문제를 여러 차례 구체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이와 관련해 한국전 초기 공산군 2천 명이 넘게 모인 한반도 내 원폭 투하 가능 목표를 하루 평균 2개 이상 확보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53년 2월께는 작전용 원폭을 일본에 저장하는 문제도 검토한 것으로 지난 1994년 말 비밀해제된 미 극비 문서들이 밝혔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휴전회담 결렬에 대비해 만주를 원폭 공격하는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정도가 일반적으로 알려져왔다.

미국은 50년 12월초 당시 갓 개입한 중공군에 타격을 입히는 방법의 하나로 수풍댐을 원폭 공격하는 가능성을 검토했다. 중공군 2차 공세 개시 열흘 후인 50년 12월 5일자 미 합참 극비문서에 이렇게 돼있다.

“중공과 유엔의 한반도 동시 철군 제의 등이 중공에 의해 거부될 경우…만주의 군수 산업 기지들을 제한적으로 ‘비핵’(非核) 공격한다. 그리고 압록강의 거대한 댐(수풍댐을 의미)과 발전 설비를 파괴한다. 이에 원폭 사용이 가능하다."

문서는 이어 “댐 공격은 (아군의) 인명 피해가 거의 없이 매우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합리적이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것과 같거나 아니면 새로 개발된 원폭 1개를 댐 뒤에서 터뜨리면 파괴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북한의 댐들을 공격하는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검토됐다. 미 공군참모총장은 52년 5월 1일 미 합참의장에게 올린 극비 보고서에서 이렇게 건의한다.

“…수풍댐을 비롯한 북한의 13개 수력 발전소는 현지 전기 공급원의 92%를 차지한다… 미 극동공군은 날씨만 양호하면 (작전 개시 후) 2∼3일 안에 댐 공습을 성공시킬 능력이 있다… 댐 공습 작전을 승인토록 건의하는 바이다.” 보고서는 이어 목표 댐들의 발전 용량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압록강의 댐을 공격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았다. 접경지대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미 극동공군은 본국 공군참모부에 보낸 52년 4월 29일자 극비 전문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 댐 공습 작전을 즉각 검토하길 바란다… 단 압록강 소재 또는 인근 목표물을 공격할 때는 합참의 사전 특별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 국방장관은 결국 52년 6월 19일 북한 댐을 공격해도 좋다고 재가했으며 미 극동군사령부는 같은날 극비 전문을 통해 이를 통보 받았다.

미 합참이 극동군사령부에 원폭 투하가 가능한 전폭기들을 특별 배치키로 한 것은 이로부터 꼭 20일 후다. 미 극동군사령관 앞으로 된 합참 극비 전문에 이렇게 언급돼 있다.

“귀관의 52년 6월 23일자 요청에 따라 원폭 탑재가 가능한 전폭기 1개 대대(18∼20대 규모)를 우선 배치키로 했다. 이는 후에 비행단(3∼4개 대대 규모)으로 확대될 것이다. 전폭기 대대는 오는 10월 전까지 도착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댐외에 공산군 주력 부대와 공군 기지 등도 원폭 공격하는 가능성을 검토했다. 미 극동군사령부가 미 존스홉킨스대학과 공동 작성한 50년 12월 22일자 ‘한반도내 전술핵 사용’ 제하의 극비 보고서와 52년 12월 3일자 미 합참 극비 정보 보고가 이를 뒷받침한다.

전술핵 사용에 관한 1백80여쪽 분량의 특별 보고서에 따르면 미 극동군사령부는 당시 원폭 투하 가능성을 감안해 그 목표로 공산군 2천명이 넘게 모인 곳을 하루 평균 2개 이상 파악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또 중공군 2차 공세가 시작된 50년 11월 25일 태천의 공산군 집결지를 원폭 공격했다고 가상할 경우 약 1만 5천 명을 희생시킬 수 있었다고 분석하는 등 원폭 사용시의 효과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는 원폭 사용 시의 정치적 문제 등을 감안해 미 합참에 견해 를 물었다. 그러나 합참 수뇌부가 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미 합참의 52년 12월 3일자 극비 정보 보고는 작전이 이뤄질 경우 원폭이 얼마나 필요한지가 “일주일 안에 잠정 파악돼야할 것”이라면서 “노출된 적의 비행장을 공격하는 데 35킬로t급 원폭이 바람직하다”고까지 건의하고 있다. 미국의 원폭 사용 검토가 당시 상당히 진전돼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일본에 원폭을 저장하는 문제가 언급된 건 53년 초다. ‘한반도 작전 강화방안’ 제하의 53년 2월 17일자 미 합참 극비 문서에 만주를 폭격하는 것과 함께 이 문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원폭 저장량 등은 언급되지 않았다.

미 합참은 원폭 사용 시의 부작용도 물론 우려했다. 53년 5월 19일자 합참 전략기획위 극비 보고서는 소련도 당시 원폭을 갖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우리가 원폭을 사용하면 적도 인천이나 부산같은 항구나 유엔군 비행장에 원폭 보복을 가할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미 합참은 원폭이 갖는 전쟁 억지력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 50년 12월 5일자 합참 극비 문서에 이렇게 언급된다.

“…미국의 전술핵 공군이 막강하다는 점을 적에게 슬그머니 흘려주자. 그러면서 적이 모르는 새로운 핵무기가 있다는 인상을 갖도록 하는게 효과적이다…”

미국은 결국 한국전에서 핵무기를 쓰지 않은 것으로 역사가 전한다. 그러나 우리가 짐작해온 것보다 훨씬 심도있게 원폭 사용을 검토한게 사실이며 자칫 잘못됐으면 히로시마의 비극이 이 땅에서 되풀이될 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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