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고 감사해…18번 홀에선 내내 울었다”

<뉴시스>

[일요서울 ㅣ 이범희 기자] 한국 여자골프의 개척자 박세리(39·하나금융그룹)가 팬들과 작별했다. 박세리는 지난 13일 인천 영종도의 스카이72 골프&리조트 오션코스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1라운드 경기를 마친 뒤 은퇴식을 진행했다.

이날 경기에서 박세리는 버디 1개와 보기 9개를 기록하며 좋지 않은 컨디션을 보였지만, 갤러리들은 그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박세리는 마지막 퍼트를 마친 후 끝내 참았던 눈물을 보이며 길고 긴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염없는 눈물로 아버지 품에 안겨 흐느끼자 관객들도 조용히 그의 곁을 지키는 등 훈훈한 모습이 연출됐다.

IMF시절 국민에게 희망 준 ‘한국 골프의 개척자’
고별전 8오버파 80타로 마무리…팬들 “수고했다”
맨발의 투혼 세리 시대를 위로하고 떠나

박세리는 그야말로 전설이다.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로 실의에 빠져있는 국민들에게 연이은 승전보를 전하며 희망을 안겨줬다.

이날도 박세리가 마지막 홀에 등장하자 그라운드 한편에는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샷을 하는 장면이 대형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또 이 장면을 공익광고로 제작했을 때 나왔던 ‘상록수’ 노래가 그린에 울려 퍼지자 많은 관중들이 따라 불렀다.

‘맨발샷’ 국민에 희망

이날 박세리는 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때부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박세리가 1번 홀 티박스에 오르자 박세리의 매니지먼트사인 세마스포츠마케팅 관계자는 “공을 안 친 지 오래돼서 이해해 주세요. 오늘 목표는 100타를 깨는 것입니다”라고 농담을 했다. 이 말을 들은 팬들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박세리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박세리가 골프채를 잡은 것은 지난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린 US여자오픈 이후 석 달 만이다.
한국여자골프 대표팀 감독으로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다녀오고 은퇴를 준비하며 신변정리를 하느라 제대로 연습할 겨를이 없었다.

1라운드에서 버디 한 개와 보기 9개를 묶어 8오버파 80타를 기록했다.
박세리는 리민(대만), 오수현(호주)와 함께 공동 76위로 대회에 출전한 78명 중 가장 저조한 성적으로 경기를 마쳤다.

경기를 마친 박세리가 18번 홀 페어웨이에 마련된 단상에 오르자 관중은 물론 박세리와 함께 경기했던 동료 선수들도 입장해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재미교포 골퍼 크리스티나 김은 은퇴하는 박세리보다 슬픈 표정으로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다. 18번 홀에서 경기를 마친 뒤 눈물을 훔쳤던 박세리는 관중이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후배 박성현(22·넵스)이 꽃다발을 전하자 손수건을 꺼내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리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세리 키즈’ 박인비는 “그동안 감사했어요. 우리 모두 언니를 본보기 삼아 여기까지 왔어요”라고 했다. 눈물을 흘리던 리디아 고는 “여섯 살 때 한국에서 세리 언니가 골프 치는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웠어요. 저의 영웅이자 세계 골프의 영웅”이라고 했다.

박세리는 대전 유성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 박준철씨 권유로 골프채를 처음 잡았다. 육상선수였던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골프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뛰어난 체력과 골프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타고난 그는 아마추어 시절 ‘프로 잡는 아마’로 명성을 떨쳤다.

갈마중학교 3학년(1992년) 때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라일 앤드 스콧 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고교 1년 때 톰보이 여자오픈마저 제패한 박세리는 고교 3학년 때이던 1995년에 KLPGA투어서 4승을 쓸어 담았다. 이듬해인 1996년에 프로 전향을 선언한 뒤에도 4승을 거둬 상금왕을 차지했다. 이때 한밤 공동묘지에서 담력 훈련했다는 와전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그의 훈련은 지독했다.

박세리에게 국내 무대는 너무 좁았다. 그래서 1997년 LPGA투어 퀄리파잉스쿨에 응시했다. 결과는 수석합격이었다.

골프 전설이 남긴 업적들

미국 진출 첫 해인 1998년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에서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스타 반열에 올랐다. 같은 해 7월 미국 ‘내셔널 타이틀’ US 오픈까지 당당히 제패했다. 특히 18번홀(파4)에서 티 샷이 감기면서 페어웨이 왼쪽 연못으로 날아갔다.

박세리는 연못 턱에 걸려 있는 공을 치기 위해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트러블 샷을 구사, 보기로 틀어막았다. 연장 두 번째 홀에서 ‘우승 버디’를 낚았다. 이 우승으로 박세리는 IMF구제금융에 시달리던 국민들에게 강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러면서 영국과의 백년전쟁에서 조국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에 빗대 ‘박 다르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검게 탄 얼굴, 종아리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하얀 발이 전 세계 골프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IMF 경제위기 속에서 시름하던 대한민국의 희망이 됐던 이유다. ‘맨발 샷’ 이후 실제 국내에서는 골프열풍이 불었고, 박인비(28ㆍKB금융그룹)와 신지애(28), 최나연(29ㆍSK텔레콤) 등 ‘세리 키즈’가 등장했다. 박세리 역시 “US여자오픈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며 “당시 연못 샷은 내 인생 최고의 샷”이라고 했다.

박세리는 1998년 제니스 무디(스코틀랜드)를 929점 차로 제치고 신인왕에 올라 1996년 카리 웹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큰 점수 차로 신인왕에 올랐다. 그는 앞서 1994년에 신인왕에 올랐던 아니카 소렌스탐, 카리 웹과 함께 필생의 라이벌로 경쟁하며 최고의 자리에 서서 LPGA 황금기를 이끌었다.

박세리는 LPGA 투어에서 치른 6번의 연장 승부에서 모두 이겨 우승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또 200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LPGA 명예의 전당에 가입했다. 박세리에 이어 지난 6월 박인비가 한국인 두 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가입했다.

골프 선수로서 거의 모든 것을 누린 박세리에게 한 가지 아쉬움은 그랜드 슬램을 하지 못한 점. LPGA 챔피언십 3차례, 브리티시 오픈과 US 오픈을 각각 한 차례씩 제패했지만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현 ANA 인스퍼레이션)을 우승하지 못했다.

박세리는 “이렇듯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은퇴한 선수가 있을까요. 정말 행복하고 감사하다”며 “첫 홀 티박스에 올라섰을 때 많은 팬들이 목에 수건을 두른 모습, 또 많이 수고했다고 응원해 준 순간부터 은퇴가 실감이 났다. 첫 홀부터 울컥했다.

하지만 경기 중간에는 동반자들과 웃으면서 플레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8번홀 티박스에 섰는데 또 눈물이 났다. 티샷을 못할 것 같았다. 18번 홀 내내 울었다. 마지막홀에 많은 분들이 서 계시고, 바라봐 주셔서 우승했던 것보다 더 행복했다.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은퇴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른바 ‘세리 키즈’들이 투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을 보면 든든하다”며 “시작은 제가 했지만 나를 대신할 후배들이 나와 또 다른 선수의 키즈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그리고 그들이 대한민국 골프를 이끌어 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은퇴 후 계획에 대해 박세리는 “최고의 선수로 기억되는 것도 좋지만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골프 유망주나 골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는 “선수의 눈으로 봤을 때 개선할 점을 찾아 골프계에 기여하고 싶다”면서 “선수들에게 좋은 훈련 환경, 좋은 시스템을 만들고 선수가 대회의 중심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고 말해 은퇴 후에는 투어 운영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박세리는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면서 “고생도 많았고 성공하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많은 것을 얻었기에 행복하다”고 골프 인생을 자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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