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러시아에 손짓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영유권 다투는 중국에 급속히 기울어 경제지원 기대하는 듯

중·러와 가까이 지내면 앞으로 미국과의 협상에 유리 판단

 

남중국해의 미군 군함에서 발진한 수륙양용 장갑차들이 물살을 헤치며 진격한다. 장갑차들이 필리핀 북부 루손 섬의 잠발레스 주 해변에 닿자 미 해병들과 필리핀 군인들이 상륙한다. 이곳은 중국·필리핀이 영유권을 다투는 스카보러 섬에서 220km 떨어진 곳이다. 지난 4일부터 9일간 실시된 미국·필리핀 연례 합동 상륙훈련 ‘피블렉스(PHIBLEX)’에는 미 해병·해군 병력 1400명과 필리핀 군 병력 500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만약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공언(公言)한 대로라면 피블렉스는 이번이 마지막이 된다. 두테르테는 지난달 28일 베트남을 방문해 하노이에서 필리핀 교민들에게 연설하는 가운데 올해 피블렉스를 가리켜 “당신(미국)은 중국이 원하지 않는 전쟁게임을 다시 하도록 계획돼 있다. 나는 당신에게 통보한다. 이번이 마지막 군사훈련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두테르테가 이런 폭탄발언을 하자 필리핀의 두 핵심 각료가 충격을 받았다. 페르펙토 야세이 외무장관은 이날 하노이에서 기자들에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튿날 필리핀 국방부는 다음과 같이 간결한 성명을 발표했다. “필리핀 국방부는 미군과의 (군사) 훈련에 관해 로드리고 R. 두테르테 대통령의 후속 지시를 기다릴 것이다. 델핀 N. 로렌자나 국방장관은 추가적인 해명과 지침을 모색하기 위해 이것을 대통령과 상의할 것이다. 앞서 천명하였듯이, 미국과의 모든 합의와 조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훈련을 계속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것을 논의하기 위해 우리의 미국 측 상대방들과 마주 앉아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25년 전 필리핀 내 미군 기지들이 필리핀 정부에 의해 폐쇄된 이래 역대 필리핀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필리핀의 옛 식민 종주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방안을 모색해 왔다. 상원의원 시절 미군 기지를 내쫓는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던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재임 1992~2001년)은 수백 명 규모의 미군 병력이 언제든 필리핀에 머물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문병력협정’을 지지했다. 글로리아 아로요 전 대통령(재임 2001~2010년)은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미국의 지원을 더 많이 끌어들였다. 베니그노 아키노 3세 전 대통령(재임 2010~2016년)은 미국이 필리핀 군 기지들 내부에 미군 전용의 영구적인 군사 구조물을 설치하는 것을 허용하는 ‘증대된 방위협력협정’을 추진했다. 이 협정에 따라 올해 3월, 대통령 선거에 앞서 미국과 필리핀은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할 군 기지 5곳을 선정했다. 여기에 필리핀 최대 육군기지 겸 훈련소인 막사이사이 기지가 포함됐다. 하지만 지난 6월 새로 선출된 두테르테 대통령은 막사이사이 기지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그는 지난 9월 중국이 막사이사이 기지 내에 마약 중독자 재활센터를 지어줌으로써 그가 밀어붙이고 있는 “마약과의 전쟁”을 돕겠다고 제안해 왔음을 공개했다. 두테르테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중국을 중시하고 미국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애써 삼갔다. 하지만 선거에서 승리하고 나자 두테르테는 필립 골드버그 주(駐) 필리핀 미국 대사를 쌀쌀맞게 대하고 심지어 그를 ‘게이'라고 비난했다(맞는 말이다. 골드버그 대사는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밝혔다). 하지만 중국 측 사절단을 따뜻하게 맞아들였으며 앞으로 협력을 확대하자는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두테르테는 지난 10월 18~21일 중국을 방문한 데 이어 오는 10월 25~27일 일본을 방문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러시아도 곧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있는 그가 미국을 방문할 계획은 알려진 바가 없다. 두테르테가 미국을 멀리하고 냉전시기 미국의 적국이었던 중국과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은 이들 나라에게서 필리핀 개발에 필요한 지원을 얻어내려는 계산으로 보인다. 두테르테는 중국과 영유권 분쟁 중인 남중국해 순찰, 그리고 필리핀 남부 무장 회교반군 퇴치를 위한 미국의 군사지원을 거부하겠다고 지난 9월 밝혔다. 그는 또 최근 기자들에게 필리핀이 “이념 장벽의 다른 쪽으로” 건너갈 것이며 중국·러시아와의 동맹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중국은 영유권 분쟁의 상대국인 필리핀과의 대화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명해 놓은 상태다. 중국은 라오스에 60억 달러를 들여 철도를 깔고 캄보디아에 이 나라 최초의 정유소를 건설해 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는 필리핀이 다음 번 수혜국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필리핀은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에 중국 자금이 대거 투입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마닐라 시내에서 소프트웨어 관련 사업을 하는 발레니스 발라세는 “중국은 사회기반시설을 정말 잘 만들며 필리핀이 사회기반시설을 갖추는 것을 중국이 도와주겠다고 말한 것을 나는 기억한다”고 《미국의 소리》 방송에 말했다. 그는 “미국도 그런 약속을 했지만 실현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리적인 면에서 우리는 중국·러시아에 (미국보다) 훨씬 더 가깝다”고 덧붙였다. 필리핀을 위한 러시아의 지원은 국방 원조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두테르테가 미국을 상대로 협상할 경우 그에게 강한 입지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분석가들은 본다. 러시아는 자타가 공인하듯이 미국에 이은 제2의 군사강국이다. 두테르테는 지난 9월 라오스에서 열린 동아시아 지도자 정상회의에서 그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에게 “무역, 상업과 같은 모든 것에서의 도움”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두테르테는 또 2년에 걸친 미국과의 공동 군사훈련 후 남중국해 분쟁수역을 미 해군과 공동으로 순찰하는 일을 중지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9월 미 군사 고문들에게 민다나오 섬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지난 7월 이래 필리핀 정부군과 회교 반군 사이에 전투가 격화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에 미 군사고문들은 14년간 머물러 왔다. 필리핀 일부에서는 민다나오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 회교반군의 화를 돋워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두테르테가 마약 사범을 근절한다며 용의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두테르테와 단단히 척을 진 상태다. 미국 정부는 미국·필리핀 관계가 실질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두테르테가 중국·러시아에 바싹 다가갈 경우 어떻게 나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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