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ㆍ미술계ㆍ영화계ㆍ예술대학 등 들불처럼 번져…‘갑을 관계’ 악용한 성추행 상습적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문화계 전반으로 성추문 파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상에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단 폭로가 급기야 ‘#미술계_내_성폭력’ ‘#예술계_내_성폭력’까지 옮겨 붙는 양상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즉각 공개 사과에 나섰지만 논란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폭로로 드러난 사연은 기성 문화계 인사들이 등단, 레슨, 전시 기회 제공 등을 빌미로 접근한 뒤 ‘갑을 관계’를 악용해 성폭력을 상습적으로 자행해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에 문화계 전반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거세게 나오고 있다.

 

웹툰작가 이자혜의 ‘미성년자 성폭행 모의·방조 논란’을 시작으로 박범신 작가, 박진성 시인 등 출판계에서 먼저 성추행 논란이 촉발됐다.

박범신 작가의 성추행 논란은 지난 21일 자신을 전직 출판 편집자라고 밝힌 A씨가 트위터에 폭로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A씨는 박 작가의 수필집을 편집할 당시 자신을 포함한 편집팀과 방송작가·팬 2명 등 여성 7명이 박 작가의 강권으로 술자리를 가졌는데 박 작가가 옆자리에 앉은 방송작가와 팬들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했다고 밝혔다. 박 작가는 이들을 “늙은 은교”, “젊은 은교” 등으로 불렀고 편집장에게는 성적 농담도 했다고 A씨는 주장했다.

또한 A씨는 박 작가가 영화 ‘은교’를 제작할 당시 주연배우 김고은 씨와의 술자리에서 극중 은교의 캐릭터에 대해 말하며 “섹스경험이 있나?”고 물었다고 떠벌이는가 하면 자신이 그동안 함께 일한 여성 편집자 전부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식의 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에 박 작가는 지난 23일 오전 자신의 트위터에 “내 일로 인해∼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하고 싶어요. 인생-사람에 대한 지난 과오가 얼마나 많았을까, 아픈 회한이 날 사로잡고 있는 나날이에요. 더 이상의 논란으로 또 다른 분이 상처받는 일 없길 바라요. 내 가족∼날 사랑해준 독자들께도 사과드려요”라는 글을 올렸음에도 비판이 계속되자 트위터 계정을 폐쇄했다.

이후 박 작가는 과거 방송에서 진행자에게 한 말로 인해 다시금 성희롱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2012년 6월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한 박 작가가 당시 진행을 맡은 배우 한혜진에게 “팬이다. 내 마음속 은교였다”고 운을 뗀 후 “혜진 씨가 종교와 부모님 그리고 애인까지 삼중 바리케이드 안에 있는 것 같아 내가 포기해야 했다”고 말했던 것이 문제가 된 것.

연이어 성추행 논란이 빚어지자 박범신 작가는 신작 장편소설 ‘유리’의 출간을 잠정 보류하고 이미 예약 구매한 독자들에게는 구매 취소를 통해 전액 환불받을 수 있게 조치했다.

성추행 피해자들 폭로 이어져

이에 앞서 B씨는 지난 19일 트위터를 통해 박진성 시인이 자신을 성희롱했다고 주장했다. B씨는 미성년자였던 지난해 시를 배우기 위해 박 시인과 연락을 주고받던 중 박 시인으로부터 “여자는 남자 맛을 알아야 한다”는 등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발언을 들었다. B씨는 사진을 통해 자신이 재학 중인 학교를 알아낸 박 시인이 “교문 앞에 서서 기다리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거리를 걸으면서 손을 잡자”고도 했다고 주장했다.

B씨의 주장이 제기되자 다른 피해자들도 폭로를 쏟아냈다.

피해자들은 주로 시를 습작하거나 박 시인의 시에 관심이 많은 이들로, SNS를 통해 연락을 시작했다가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박 시인이 개인적 안부를 지속적으로 묻는가 하면 “전화로 목소리를 듣고 싶다, 노래가 전공이니 전화로 노래를 불러 달라”는 등 사적인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진술도 나왔다.

피해자 C씨는 박 시인이 자살을 하겠다고 연락해와 새벽 기차를 타고 그가 거주하는 대전에 내려갔다. 당시 술을 마시고 있던 박 시인은 “너는 색기가 도는 얼굴”이라며 키스를 하고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했다. C씨는 이후 박 시인과 노래방에 가서 ‘자의적이지 않은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박 시인은 지난 22일 자신의 블로그에 ‘사죄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저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께 사죄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의 부적절한 언행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올해 예정되어 있던 산문집과 내후년에 출간 계획으로 작업하고 있는 시집 모두를 철회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SNS 계정을 닫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문인들의 성추문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박범신 작가, 박진성 시인에 이어 지난 24일에는 ‘네모’, ‘반복’ 등의 시집을 낸 이준규 시인의 여혐 행태도 고발됐다.

D씨는 이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문지문화원에서 열리는 한 남성시인의 시 강좌를 신청했다. 첫 강의가 시작되기 전 시인과 함께 단둘이 담배를 피울 일이 있었다”며 “‘너 섹시하다. 나랑 자서 네 시가 좋아진다면 나랑 잘래?’는 그 자리에서 그 시인이 한 말”이라고 적은 뒤 그가 이준규 시인이라고 폭로했다.

이 시인은 이와 관련해 트위터에 “기억나는 일은 아닌데, 저의 지난 술버릇과 여성을 대하는 가벼운 태도로 보아, 사실로 보는 것이 맞고 그러니 인정한다”며 “저의 가벼운 말과 행동으로 인해 무거운 치욕과 분노를 겪었을 분들께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 시인은 지난달 개강한 문지문화원의 가을 아카데미에서도 강사를 맡았으나 성폭력 의혹이 제기되자 강의를 폐강했다.

이 외에도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와 함께 트위터 상에서 남성 문인들의 성희롱 및 성폭력에 대한 폭로와 고발이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한국작가회의는 지난 25일 홈페이지를 통해 “SNS에 우리 회원과 조직 이름이 성추문과 한데 묶여 거명되는 사태를 지켜보는 심정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며 “정관을 위배하거나 품위를 현저히 손상시킨 회원은 소명절차를 거쳐 이사회 결의로써 자격 정지 또는 제명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속하게 해당회원들의 소명을 청취하여 절차 따라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비단 출판계뿐만 아니라 미술계 역시 최근 성추문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문인들의 성추문으로 시끄러워지자 지난 22일 트위터에는 함영준 일민미술관 책임 큐레이터의 성추행 행각을 폭로하는 증언들도 연이어 고개를 쳐들었다. 앞서 지난 21일 밤 온라인 전자 필기장 에버노트에 함 큐레이터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21살 예술대학 여대생인 ‘소마-킴(Soma-Kim)’의 글이 게재되면서부터다.

소마 킴은 이 글에서 “지난해 11월부터 약 한 달간 함 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면서 “그가 작업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해 만난 뒤 차 안에서 손을 잡고 다리, 어깨 등을 만지고 성적인 언급을 계속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함 씨로부터 비슷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자들이 계속 생길 것 같아 어렵게 글을 올리게 됐다”고 털어놨다. 글이 나온 뒤 SNS 등에서 “대학 술자리 때 그가 속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는 등의 여러 성추행 내용들과 “함 씨가 신문에 페미니스트라고 기고했을 때 기가 찼다”는 등의 증언이 이어졌다.

논란이 확산되자 함 큐레이터는 사과문을 통해 “미술계 내에서 저의 지위와 권력을 엄밀히 인식하지 못하고, 특히 여성작가를 만나는 일에 있어 부주의했음을 인정한다. 신체 접촉이 이루어진 부분에 대해 깊이 사죄하고 후회한다. 책임지고 모든 직위와 프로젝트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사립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성 추문 논란에 휩싸인 데 이어 이번에는 국립미술관 소속의 큐레이터가 미술 작가를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지난 25일 트위터에서 ‘#미술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달고 미술계에서 벌어진 권력 남용 성추행에 관한 폭로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한 여성이 국립현대미술관 최흥철 큐레이터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리에서 억지로 입을 맞췄다. 기획전 참여를 미끼로 던졌다”고 폭로했다.

현재 SNS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은 큐레이터의 권력으로 미술계에서 각종 성추행을 일삼아온 최흥철 큐레이터에 대해 조속히 조사 후 입장표명 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최 모 큐레이터와 관련한 추문은 그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하기 이전 기관에서 발생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한 후 관계 규정에 따라 엄정히 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단과 미술계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여성 성추문 논란은 지칠 줄 모르고 영화계까지 번졌다.

논란의 주인공은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모씨.

지난 25일 한 여성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김 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사건을 폭로했다. 이 여성은 “김 씨가 자신의 작업물을 같이 보자며 집으로 유인, 관계를 가졌다”고 밝혔다. 또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성관계를 강제로 가졌으며, 이후 성폭행 당하는 것처럼 연기해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트위터에는 “자신은 다자연애주의자라며 가학적 성행위를 강요해놓고 자기 애인에게 선물을 주는 사진을 올려 괴로웠다” “전주국제영화제서 만나 맥주 한잔했는데 2차로 모텔을 가자더라” 등 김 씨에 대한 폭로가 잇따랐다.

피해자는 여러 명으로 확인되며, 여성들은 김 씨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폭로된 김 씨는 영화전문지 ‘씨네21’에서 평론으로 등단했다. 논란이 일자 ‘씨네21’ 측은 “평론가 김 씨와는 이미 모든 계약 관계를 끊고 법적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밝혔고 김 씨는 트위터 계정을 삭제했다.

성추문으로 상아탑까지 ‘흔들’

이뿐만이 아니다. 문화계 성추문 논란이 커지는 가운데, 문화예술계 대학으론 국내 최정상급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캠퍼스 내 성추문이 이어져 충격을 주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만든 트위터 ‘여성혐오 아카이빙’ 계정에는 일부 교수들의 도를 넘은 성추행과 여성혐오 발언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예쁜 여학생들 일렬로 앉아보라” “남자친구랑 잤느냐” “얼굴도 예쁜(혹은 못생긴)애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 “요즘 미친년이 없어서 아쉽다. 미친년이 있어야 학교가 생기가 돌텐데…”등의 말을 거리낌 없이 했다는 게 학생들의 폭로다.

교수가 대놓고 사귀자고 하는가 하면 “여자랑은 일하기 힘들다”는 등 여성비하적 발언도 비일비재하다.

성추행 혐의로 지목된 교수들의 이름이 이니셜로 거명되며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가운데 학교 측은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진상조사 및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문단과 미술계ㆍ영화계에 이어 예술대학 캠퍼스까지 잇단 성추문 논란이 다음엔 어디로 튈지 문화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를 두고 문화계 내부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다수다. 한번 지명도가 올라가면 존재 자체로 ‘권력’이 되는 문화예술계 내 극심한 권력 불균형과 이로 인해 문제가 생겨도 공론화할 통로가 없는 폐쇄적인 환경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편집자는 “출판업계는 조직 내 수직관계가 극명해서 편집자는 편집을 잘하는 것보다 대형 작가들의 비위를 잘 맞춰야만 실력을 인정받기 때문에 철저한 갑을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미술계 관계자는 “일련의 성추행 논란은 문화계의 갑을 관계에 따른 폐쇄적인 환경에서 비롯됐다”면서 “문화계를 좌지우지하는 인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계속 작업하기 위해서 지망생 등 약자들은 웬만한 것쯤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갑을관계’ 내에서 일방적으로 성폭력을 당했을 경우,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는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는 분석이다. 문화계 내 과거 성폭력 사건들이 문단 내 성폭력이 이슈화한 것을 계기로 지금에서야 급격히 수면 위로 부각된 이유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