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改憲 기도 저지 위해… 트루먼도 원칙 재가

쿠데타 조짐에 주목… 李대통령 실권 시 장기외유案 검토

미국은 1952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장기 집권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최악의 경우 유엔군사령관이 통제하는 임시 정부를 세우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트루먼 미(美)대통령도 이른바 ‘부산(釜山) 정치 파동’으로 촉발된 당시의 한국 정정(政情)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이같은 대책을 원칙적으로 재가했던 것으로 지난 1994년 말 공개된 미(美)극비 문서들이 밝혔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이(李) 대통령이 권좌(權座)에서 밀려나면 유엔 비용으로 그를 장기 외유시키는 방안도 검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한국군 내 쿠데타 조짐을 감지하고 친미(親美) 계열 장성 등을 통해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미국이 임시 정부 수립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거론한 것은 52년 6월말께다. 이(李)대통령이 종신제 직선 개헌(改憲)에 반대하는 국회를 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부산 정치 파동’이 시작된 지 한 달여 만이다.

‘부산 정치 상황과 관련해 유엔군사령관과 주한(駐韓) 미(美)대사에게 보내는 지침’이란 제목의 52년 6월 25일자 미(美)합참 극비 보고서에는 미국이 사태 수습을 위해 최악의 경우 군정(軍政)도 불사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보고서는 부산 사태가 악화돼 유엔군의 작전에 방해가 될 경우 군정(軍政)도 실시할 수 있다는 내용의 대책이 미(美)국방장관의 “비공식 승인”을 받았으며 “(트루먼)대통령도 일부가 손질된 상태로 이를 재가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부산 사태와 관련한 “불법적이고 헌법을 무시하는 행동”을 자제토록 미국이 이(李)대통령을 최대한 설득해야 하나 실패할 경우 “유엔군사령관이 한국 군경(軍警) 등을 앞세워 직접 통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은 이보다 앞서 52년 5월 31일 합참에 보낸 극비 전문에서 “이(李) 대통령을 계속 설득해야 하겠으나 희망이 없다”면서 “오직 남은 대안은 어떤 형태로든 임시 정부를 세우는 것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유엔군사령관과 주한(駐韓) 美대사에게 통보된 지침에 눈길을 끄는 내용이 또 있다. 유사시 신중한 대처를 거듭 강조하면서 군정(軍政)이 실시되더라도 가능하면 전면에 나서지 말도록 충고한 것이다. 해당 대목은 이렇다.

“군정(軍政)시 한국 정부 조직을 가능한 한 한껏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의 주권이 살아있음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군에 지시를 내릴 때도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군정(軍政)이 이뤄지더라도) 적절한 한국 정부 관리와 조직들을 충분히 보호해야 한다…”

보고서는 비상 통치를 위한 병력 사용시의 유의사항도 덧붙인다. “병력을 투입해야할 경우 가능한 한 한국군을 써라. 설사 유엔군이 움직이더라도 그 규모를 할 수 있는 만큼 최소화해야 한다.”

보고서에는 이 밖에 ▲군정(軍政)은 어디까지나 최후 수단이며 ▲이(李)대통령이 임정(臨政) 수립 문제를 둘러싼 미(美) 정계와 군부간의 견해차를 악용하지 못하도록 신경 쓰라는 로버트 미(美) 국방장관(직대)의 지적도 덧붙어져 있다.

미국은 당시 이(李)대통령이 권좌에서 밀려날 경우를 감안한 대책도 세웠다. 52년 6월 25일자 합참 보고서는 “지금 선거가 실시돼 이(李)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면”이란 가정 하에 이렇게 언급한다.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나 이(李) 대통령이 순순히 패배를 시인할 경우 유엔이 돈을 대 그를 전세계로 외유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李) 대통령은 외유를 통해 한국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국제사회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주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당시 한국 군부에 감돌던 반(反) 이승만(李承晩) 기류에도 신경을 썼다. 완연한 쿠데타 조짐이 미(美) 첩보망에 잡혔기 때문이다.

미(美) 합참의 52년 6월 3일자 극비 문서는 부산의 미(美)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한국 군부 동향을 전하고 있다. 미(美) 대사관의 해군 무관이 52년 6월 1일 밤 한국 해군의 孫(Sohn)제독으로부터 들은 내용으로 돼있다. 문서는 손(孫)제독을 “해군 작전 책임자”라고 소개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이(李)대통령은 한국 내 반발과 트루먼 대통령의 (우려 표명) 메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자기 식대로 밀고 나갈 것이다…손(孫) 제독은 한국군 내에 이(李) 대통령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쿠데타 얘기는 여기서 이어진다. “미국이 모르는 체할 경우 군부와 기타 분야의 이들 반(反) 이승만(李承晩) 세력이 ‘행동’할 것이라는 게 주한(駐韓) 미(美) 대사관의 판단이다. 만약 일이 벌어지면 ▲원용덕(元容德) 당시 계엄사령관을 비롯한 일부 친(親) 이승만(李承晩)계) 인사가 체포되고 ▲李대통령과 국회가 ‘보호’되는 한편 ▲계엄령이 한시적으로 강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美) 합참은 이후 53년 7월 2일자 극비 문서에서 “53년 1월초 당시 이종찬(李鍾贊) 중장이 한국군내 반(反) 이승만(李承晩) 그룹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면서 “일본에서 군사 학교를 나온 인물이 많은 이 그룹에 최경록(崔慶祿) 소장, 강영훈(姜英勳) 소장 등이 포함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해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姜昌成)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산 정치 파동을 계기로 당시 군부에 반(反) 이승만(李承晩) 세력이 형성됐다”면서 “이들이 이종찬(李鍾贊) 장군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지만 이(李) 장군이 거절하는 바람에 무산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미국은 당시 이(李)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막으려고 애를 썼으나 52년 7월 4일 발췌 개헌안의 전격 통과라는 이 대통령의 마구잡이식 밀어붙이기에 결국 허를 찔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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