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봉을 거쳐 평창을 지나 거칠게 굽이치던 강원도의 뾰족이 솟은 산자락이 잠시 숨을 고른다. 소백산에 닿기 전, 비단결 같은 평창강이 어여쁜 마을 하나를 감싸며 흐른다. 온순하고 인정이 많은 땅, 영월이다.
 
한반도를 담은 작은 마을, 선암

언젠가 한반도 지형을 그대로 닮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신의 손으로 빚은 마을 풍경은 한반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세심한 부분까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고기를 잡고 삶을 일궈내던 이들은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마을의 배경이자 숱한 사계절을 함께 보냈던 삶의 일부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두고 한반도를 닮았다고 해 ‘한반도 지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반도 지형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야트막한 산 위에 오르니 사진 속 마을 풍경이 노을에 너울지고 있었다.

갑갑한 차 안이 답답해 창문을 열었을 때, 얼굴에 훅-하고 내려앉은 청량한 바깥 공기처럼. 맑고 청명한 풍경이 거기에 있었다. 전망대에 오른 이들은 누구나 탄성을 내뱉었다. 서쪽 강가에 쌓여있는 모래와 동쪽 강가에 빼곡히 뿌리내린 나무들까지 서해안과 동해안을 꼭 빼닮았다.

단종의 아픈 이야기가 스민 곳이기에 이 작은 한반도 지형이 신기한 볼거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왕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그 때. 영월은 유배를 떠나온 어린 임금 단종을 슬픔과 환희 속에 맞이했다. 서둘러 가을을 마중 나갔던 영월은 첫 여행지부터 그토록 뜨겁게 객을 맞이했다.
검은 황금, 강원도 탄광문화촌
 
1960년대 석탄이 검은 황금으로 불리며 탄광촌 일대는 어느 대도시 부럽지 않을 만큼 부유했다. 하지만 세월이 훌쩍 지난 요즘은 탄광촌의 치열했던 삶의 현장을 재현해 놓은 모습이 전부이다. 아직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들른 탄광문화촌에는 광부들의 고된 삶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과거 탄광이 있던 마을 자리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탄광 생활관에서 탄광 민들의 일상을 만난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의의 사고. 음악을 듣거나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거대한 불안감을 버텨냈던 이들의 모습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생활관을 나와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석탄 채취를 위해 파놓은 ‘갱도’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 바깥보다 훨씬 낮은 기온의 캄캄한 갱도는 그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일터였다.

지금은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활기 넘쳤던 탄광촌의 시끌벅적함이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가 이 곳에서 흔적을 감췄다. 갱도의 가장 깊은 곳인 막장 작업장에서 뒤를 돌아 바라보니 입구의 빛이 저만치 멀다. 오직 어둠과 빛만이 존재하는 갱도에서 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입구를 통해 갱도를 빠져나오니 이번엔 칠흑 같던 어둠이 거짓말처럼 멀다.

<tip> 채탄 시설 야외 전시장
생활관에서 갱도로 가는 길에는 채탄에 사용되었던 크고 작은 시설들이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광차에 쌓인 석탄을 쏟아내던 티플러, 석탄 운반을 위한 견인장치인 권양기. 탄차라고도 불리던 광차와 광부를 작업장으로 수송하던 인차까지. 일반인들이 보기 어려웠던 갱도 내부의 채탄 시설들도 실물로 확인할 수 있다.

268인의 충신과 어린 단종, 장릉
 
장릉부터 가는 것이 좋을까, 아님 청령포부터 가는 것이 나을까 고민하다 장릉 앞에 차를 세웠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단종은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의 세력에 밀려 영월로 내려온다. 세종의 큰아들인 문종이 2년 만에 병사한 이후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단종은 거친 운명의 소용돌이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출산 후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한양에 두고 온 왕비. 기댈 곳 없이 고단한 십대를 보내던 단종의 한숨이 들려오는 듯하다. 1457년 단종을 둘러싼 군졸들의 행렬이 영월로 이어졌다. 숙부인 수양대군의 지시로 유배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단종에서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어린 임금은 다시 노산군으로 강봉됐다. 그리고 결국 이곳에서 사약을 받게 된다. 피바람이 끊이지 않던 조선시대, 단종에게 왕위는 어쩜 죽음보다 더 두려운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조선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세호가 없는 곳. 봉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인 망주석에 새기는 조각인 세호도 단종의 무덤 앞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차라리 먼저 장릉을 보고 나니 청령포로 향하는 마음의 무게가 조금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17세에 죽음을 맞이한 단종을 따라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은 268인의 충신들의 위패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육지 속의 작은 섬, 청령포

배에 오른 지 2분 남짓, 방향을 트는가 싶더니 이제 내리라는 안내가 들려온다. 영월강변 저류지에 쓸쓸한 작은 섬처럼 떠 있는 이곳은 청령포라는 이름보다 단종의 유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배를 타고 가기엔 너무나 가깝지만 그렇다고 걸어갈 수는 없는 곳. 육지 곁에 있으면서도 외따로 떨어져 있어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곳. 이토록 적막한 곳에서 단종의 유배생활은 시작됐다.

청령포에 닿으면 누구나 넋을 놓고 바라보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가 나무 사이로 들려오곤 했다는 관음송인데 30미터에 달하는 이 소나무는 특이하게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자라났다. 600년이라는 세 월을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온 관음송. 이 소나무 그늘 아래 가끔 단종이 찾아와 쉬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지고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나머지 한쪽은 벼랑이 솟아올라 거리는 가깝지만 배로 건너야만 하는 곳. 오후가 되자 커다란 구름떼가 청령포의 하늘을 뒤덮는다. 구름 너머 맹렬한 태양 이 있을 테지만 구름 아래 청령포에는 관음송 사이로 조용히 이는 바람 소리만 가득할 뿐이었다.

숨겨두고픈 절경, 요선정

영월 사람에게 숨겨두고픈 장소를 묻자 지체없이 요선정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기이하고 거대한 바위들이 강물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깎아지른 절벽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곳. 하늘과 강물 그리고 바위와 숲이 함께 만들어낸 최고의 절경은 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신선이 유람하는 암자’라는 글귀를 바위에 새겨 넣은 조선 시대 의 문필가 양사언의 표현이 절대 과하지 않아 보이는 경관 앞에서 카메라의 한계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작은 오층석탑과 마애불상이 정자와 함께 있어 쉬어가기에도 좋다.

정자 그늘에 앉아 법흥계곡의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요선정에 오를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정자 안쪽으로 돌아가야 절벽을 만날 수 있고, 바로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야말로 요선정이 건네는 최고의 선물이다.

# 지붕 없는 박물관 도시 영월에서 함께 둘러보면 좋을 3곳

영월 미디어 기자박물관

폐교를 꾸며 만든 영월 미디어 기자박물관은 지역 내에 있는 수많은 박물관 중에 서도 분명한 콘셉트로 눈에 띄는 곳. 사진기자로 재직했던 고명진 관장이 지나온 생생한 기자의 삶을 담아놓은 공간으로 의미 있는 사진들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에 뽑힌 광주민주항쟁 사진은 박물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명진 관장이 직접 찍은 사진이 특히 유명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멈춘 폐교 안에 들어선 박물관. 이제 이곳은 기자 체험을 하기 위해 방문하는 아이들로 인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시대를 따라 변 화해온 다양한 카메라들도 전시되어 있으니 빼놓지 말고 둘러보길 추천한다. A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서강로 1094.

동강사진박물관

제 15회 동강국제사진제가 열리고 있는 동강사진박물관. 영월군이 주최하는 동강국제사진제에서는 영월을 배경으로 담아낸 다양한 작가들의 감각적인 작품들을 한곳에서 볼 수 있다.

지역 박물관이지만 규모나 수준이 높아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이 많을 정도. 보도사진가 전과 군민사진 전, 거리설치 전 등이 함께 열리고 있어 볼거리가 더욱 풍성하다.

영월군청과 맞닿아 있어 찾기도 좋고 장릉과 가까워 함께 돌아보면 더욱 풍성한 여행이 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사진예술창작체험 공원도 산책하듯 걷다 보면 추억 사진을 남기기에 좋은 곳들이 많다. 다양한 시선으로 담아낸 동강과 강원도의 아름다움이 궁금하다면 꼭 들러보자. A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월로 1909-10.

별마로 천문대

깨끗한 자연과 맑은 하늘을 가지고 있어 별을 보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 는 영월. 그 속에서도 해발 800미터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별마로 천문대는 ‘별을 보는 고요한 정상’이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봉래산 정상에서 감상하는 영월 야경은 물론 8미터의 돔 스크린 아래 앉아서 듣는 별 이야기는 신비롭기만 하다. 4층에 마련돼 있는 관측실에는 여러 종류의 천체망원경이 있는 데 방문객들은 이를 통해 별과 달, 행성과 성운 등 다양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가상현실을 구현한 패러글라이딩과 4D라이더 체험존이 있어 더욱 즐겁다. A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천문대길 397.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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