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8일 ‘국회 추천 총리에게 내각 통할의 실질적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민과 야당의 뜻에 따르겠다는 행보다. 현행 헌법상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최대치다. 그러나 야당은 9일 대통령의 2선 후퇴와 탈당, 이정현 대표의 사퇴 등 또 다른 조건을 걸며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논의 자체를 거부했다. 대신 12일 열리는 ‘민중총궐기대회’에 당력을 집중해 적극 참여하기로 했다.

야당들은 정치적으로 난국을 해결하는 대신 정권 퇴진 운동을 선택했다. ‘최순실 게이트’를 대선까지 끌고가겠다는 속셈이다. 야당은 국정을 수습하고 안정시키면 국민의 분노가 식을 수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래서 자고 나면 새 조건을 달며 국정 공백을 장기화 시키고 있다. 미국 대선의 ‘트럼프 충격’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논의도 없다. 오로지 안보와 경제가 어찌 되든 현재의 ‘헌법장애’ 상태를 즐기겠다는 속내다. ‘진영논리’에 매몰된 저급한 당리당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후안무치하다.

미증유의 국가 위기 상황에 집권 여당은 정부와 함께 국정을 추스르고 국민을 안심시킬 의무가 있다. ‘선 국정 정상화, 후 당 재건’이 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무성과 새누리당 비주류들이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고 ‘당 해체 후 재창당’을 요구한 것은 당을 지리멸렬 상태로 이끄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이다.

야당의 ‘대통령 2선 후퇴’ 주장은 위헌이다. 국회는 대통령이 내란이나 외환죄를 범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통령의 권력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야당의 주장은 ‘이포역포(以暴易暴)’다. 폭으로 폭력을 다스릴 수 없고, 불법으로 불법을 다스릴 수 없는 법이다. 야당도 헌법 테두리 내에서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수권 정당으로서의 책임 있는 자세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물러나라고 해서 물러나는 자리가 아니다. 물러나고 싶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물러날 수 있는 자리는 더욱 아니다. 국회는 헌법이 인정한 탄핵을 통해서만 대통령의 권한을 박탈할 수 있다. 야당이 총리 추천 제안을 받기 싫으면 차라리 대통령 탄핵을 주장해야 한다. 그것이 차라리 당당하다.

이제 야당은 촛불을 이용한 거리 정치를 그만 둬야 한다. 노동자연대·사회진보연대·환수복지당 등 좌파 단체들은 지난 두 차례 촛불집회에서 ‘노동개악 철폐하라’ ‘혁명정권 이뤄내자’ 등의 구호를 선창하고 유인물을 배포했다. 또한 ‘중고생이 앞장서서 혁명정권 세워내자’는 플래카드 등장은 현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배후 조정 세력이 따로 있음을 의심케 한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SNS 상에서 유포되고 있는 한 스님의 ‘이뭣꼬?’ 촛불집회 참관기이다. 촛불집회 참석자들에게 “1인당 5만원 지급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법치 유린행위이다. 사직당국의 조속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한다.

한반도 정세가 내우외환이다. 최근 미군은 7년 만에 비전투요원(한국 내 미국 민간인들) 소개(疏開) 훈련을 했으며, 영국 전투기가 6·25 전쟁 이후 처음 한반도에서 ‘가상의 적’ 지휘부를 정밀 타격하는 한·미·영 공군 연합 훈련을 했다. 이 와중에 미국 대선에서 대이변이 일어났다. 예상을 뒤엎고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한 트럼프가 제4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반도 정세가 격랑을 타게 됐다. 한미 FTA 재협상 요구가 발등의 불이 되고, 주한미군 방위비 문제를 포함한 한미동맹의 뼈대가 흔들릴 수도 있다.

우려했던 최순실발(發) 외교·안보 공백이 현실화 되고 있다. 당장 박 대통령이 오는 19∼20일 열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불참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한미동맹 강화 등 협력도 차질을 빚을 수 있으며, 사드(THAAD) 배치조차 불투명해지고 있다.

지금 국민이 ‘최순실 사태’에 분노하고 있지만 나라가 주저앉으라고 바라는 것은 아니다. 민심의 요구는 진상은 철저하게 파헤치고 규명하되 안보를 지키고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가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스캔들로 권한이 축소될 수 있다”며 “승자는 북한과 중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이제 야당은 새 총리 추천에 더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야권 대선주자들은 국민이 지켜보는 칼날 위에 서있다. 국가 위기를 외면한 채 국정 혼란 상황을 즐기면 국민의 준엄한 심판에 내몰릴 것이다. 지금이야 말로 ‘당보다 국가’를 위 할 때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지이영지 불여기이(持而盈之 不如其已)’, ‘가지고 있으면서 더 채우려고 하면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고 했다. 거야(巨野)는 ‘과유불급’을 염두에 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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