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의 갑질, 막아낼 수 없어···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방송계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들이 고용불안과 높은 노동 강도 등으로 고통 받고 있다. 비정규직·파견직으로 불리는 이들의 등장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중후반, 방송 산업이 한창 확장되던 무렵 IMF에 강타 당하며 ‘구조조정’이 실시됐다. 이후 방송 산업은 방송사에 직접 고용된 정규직, 간접·특수고용직, 상시·한시계약직 등 다양한 고용형태가 자리 잡았다. 하나의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편집, 연출, 음향, 촬영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과 소수의 정규직들이 참여한다. 게다가 지상파 방송사의 독과점 방지를 위한 의무외주제작 정책에 따라 도입된 외주제작업체에도 비정규직 노동자가 발생하고 있어 문제다.

비정상적 복지·노동으로 인한 자진 퇴사율 증가

인력부족 현상, 충원을 위해 비전문가 뽑아

25살에 조연출로 방송계에 뛰어든 H씨(27·여)는 새로운 분야 경험을 위해 비정규직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실력 있고, 연차가 높으면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4대 보험과 추가근무 수당 등 당연한 복지혜택을 바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잠을 못자고 밤새며 일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급여도 80만 원 이하였다”고 전했다. 또,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해고통지를 받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일어난다”고 본인이 겪었던 현실에 대해 털어놓았다. H씨는 문자로 갑작스럽게 해고통지를 받고 부당해고를 항의하려 방송국에 전화를 걸었을 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본인 이외 같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제작진 모두 해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는 프로그램 폐지를 뜻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보장된 자리는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방송계를 떠나게 됐다.

‘뼈 빠지게’ 일해

입에 풀칠할 돈 받아

방송국 종합편집실에서 일하는 S씨(23·여)는 외주제작사 소속 직원이다. S씨는 “경력 없는 신입 같은 경우 말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생활한다. 야근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주말마저 반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또, 그녀는 “집이 멀지만 새벽까지 일할 때가 많다. 하지만 택시비를 받아본 적이 없다”며 “전체적으로 과거에 비해 소규모 외주제작사가 늘어나 제작하는 프로그램 단가가 낮아져 개인의 임금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S씨는 황당한 경우를 겪기도 했다. 그녀는 “인기예능프로가 갑자기 분량이 늘어나 방송사가 강제로 뒷시간에 방송될 프로그램의 분량을 줄이는 경우도 있었다. 종합편집실 직원이니 이런 황당한 경우를 자주 본다”며 “프로그램 제작사는 외주였고 시청률이 낮아 부당한 경우를 겪어도 하소연 할 곳이 없다”고 전했다.

방송작가 파견은

파견법 위반

방송계에서는 작가, 조명, 음향 등 다양한 분야 채용 과정에서 용역업체를 통한 파견 근로 형태가 적지 않다. 하지만 방송작가의 경우 파견법에 의해 파견 고용이 불가한 업종이다. 하지만 많은 방송사에서 프리랜서 작가를 쓰고 있다.

한 언론사 보도에 따르면 일부 지상파 방송사 방송작가들 중에서는 파견업체를 통해 2년 파견계약직으로 고용된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인력 채용 사이트와 각 지상파 방송사 구성작가협의회 홈페이지 등을 확인한 결과 방송작가를 파견업체에서 채용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고용은 파견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형태다. 실제로 방송작가는 현재 파견법 상 파견 불가능 업종에 포함돼 있다. 파견법 시행령에 따른 근로자파견대상 업무에는 영화, 연극 및 방송 관련 전문가의 업무가 포함돼 있지만 방송작가와 기자 등은 해당하지 않는다.

방송 전문지식을 갖추지 않은 파견 직원의 증가 추세는 결국 컨텐츠 질 저하까지도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한편, 방송국 촬영팀에서 프로그램 촬영 보조를 맡고 있는 O(25·남)씨는 입사 전 인력 채용 사이트에서 촬영 보조를 구한다는 소식에 입사지원을 했다. 일을 시작한 뒤 고용형태가 파견계약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O씨는 모 대학 방송제작기술전공학과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이력도 쌓았지만 입사지원을 했을 때 전공 관계성과 전문지식 등은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방송계가 전문성을 요하는 집단이지만 신입만큼은 일명 ‘몸만 건강한’ 사람을 뽑아 중노동을 시킨다는 것이다.

방송국 파견근로자 O씨

겉은 방송국 직원

차별대우 받는 외주·비정규직

O씨는 프로그램 촬영 시 약간의 쉬는 시간이 발생하면 매번 눈치를 본다. 방송국에 파견근로자는 많지만 O씨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선 파견근로자가 O씨 혼자다. 흡연자라면 쉬는 시간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라도 하지만 비흡연자인 O씨는 그럴 기회도 없다. 또, 방송계 차별적 구조 덕분에 선뜻 말을 걸기도 힘들다.

O씨는 “절대 방송국 정규직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간의 위치와 차이는 존재한다”며 “파견근로자들을 대표해줄 사람도 없고 파견대행업체에서 주기적인 실태조사와 상담을 하지 않아 고충을 털어놓을 곳이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외주제작사 직원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최근 들어 프로그램 제작 시 방송국 정규직만큼 외주제작사 직원과 프리랜서가 많아졌다. 하지만 같은 프로그램 제작사임에도 불구하고 갑과 을이 존재하고 인격모독과 부당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참을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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