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제목인 ‘남쪽으로 튀어’처럼 오키나와는 어딘지 남쪽을 향하고 싶을 때 가장 완벽한 종착점이다. 하늘빛 바다와 바다빛 하늘로 이루어진 공간. 류큐왕국이 전해주는 보물들로 가득 찬 섬. 오키나와로 향하는 것은 우리에게 항상 미련처럼 남아있는 섬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고백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오키나와는 멀지 않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여밖에 걸리지 않는 오키나와는 어느덧 일본 내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가 됐다. 오키나와가 가지고 있는 많은 끌림 중 하나는 단연 남쪽이라는 데에 있다.

남쪽이라는 지리적 뉘앙스는 확실히 동서와 북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심적인 온도에서 차이가 있다. 그 온도는 물론 따뜻하며 추운 날에도 결코 차갑지 않다.

류큐왕국이 가지고 있었던 찬란했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것도 오키나와를 여행하는 많은 이점 중의 하나다. 오키나와는 예전에 류큐왕국으로 불렸고 일본으로 귀속되기 전에 분명히 일본 본토와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이어왔던 류큐의 땅이었다. 류큐와 오키나와 그 사이. 그 짤막한 이야기.

모자람 없이 넉넉함
숙소에서 나하 시내의 중심부인 국제시장까지 걷기로 했다. 여행지 어디를 가나 도시를 시각적으로 익히기 위해서는 항상 내 자신이 직접 두발로 걸으며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최고였다. 오른쪽에 도심을 관통하는 수로가 있고 왼편에는 낮은 건물들이 있다.

건물들의 외벽은 딱히 색채가 강하지 않다. 골목에 보이는 세탁소와 도장가게 그리고 텅 빈 주차장. 자전거는 급하지 않은 소리를 내며 코너를 돌았고 머리 위로는 모노레일이 지나갔다. 이후 도랑을 가로지르는 자그마한 다리를 건넌다. 내 눈과 발은 나하 시내를 입체적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처음 와 본 오키나와에 있기 때문이다.

조금 습하지만 맑은 바람을 맞을 수 있는 남쪽나라여서 그랬을까. 평소보다 발걸음이,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발랄해졌다. 오키나와를 아무래도 몇 번 더 올 것 같은 예감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나하 주변을 중점적으로 다니기로 했다.

나하는 ‘어장’이라는 뜻의 오키나와 방언인 나바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깨끗하고 조용한 거리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 하늘은 오후가 넘어가면서 다소 짙게 어두워졌지만 그 어두운 하늘이 꼭 불안한 밤을 예고하지는 않았다.

숙소가 있는 토마린 항구에서 오키나와 최대 번화가인 국제시장으로 가는 사이에는 파라다이스 거리로 불리는 길이 있다. 잘 꾸며진 소소한 카페들과 식당들은 이 거리를 차분한 소품들처럼 꾸며져 있었다. 어딘지 연극 무대처럼 느껴지던 거리. 식당의 차양 너머로 결코 왁자하다고는 볼 수 없는 정경들이 보이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거리는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한 방식을 보여준다. 충분, 모든 것이 모자람 없이 넉넉한 것. 그렇다. 모든 것이 충분하다면 그곳이 바로 파라다이스겠지.

파라다이스 거리

파라다이스 거리를 돌아다니다 헌책방엘 들렀다. 낡은 책들과 이차선 골목 그리고 옛것의 냄새와 기억, 노스탤지어는 그 지점에서 정확히 만난다. 입구에 붙은 ‘미군을 반대한다,

그러나 미국 시민은 환영한다’는 포스터가 왠지 오키나와를 설명해주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라고 느껴졌다. 본토와는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군이라는 숙명을 감내하는 오키나와 사람들.

내부에는 길 에반스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초로의 사장은 그저 책 속에 파묻혀 올드 재즈를 들으며 지나가버린 추억을 곱씹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고본 다자이 오사무의 중고 책 세 권을 산 후 다시 국제거리로 향했다.

1마일의 기적, 국제거리

나하 시내 중심부의 국제거리는 가로로 길게 조성돼 있는 거리의 이름으로 총 길이가 1마일1.6km에 불과하지만 주위의 마키시 시장과 츠보야 도자기 거리, 미도리카오카 공원까지 연결돼 나하 시내 최대의 번화가로 손꼽힌다. 특별한 목적을 두고 오키나와를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이곳을 들르게 마련이다.

이곳은 2차 대전 이후 폐허에 가까웠던 오키나와에서 가장 빨리 복구된 지역이기에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 국제거리를 ‘1마일의 기적’으로도 부른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모든 것이 없어진 벌판에서 패배적인 낭만을 빠른 속도로 지우고 이렇게 다시 오키나와를 이루어놓았다. 나하 시내 자체가 대단한 관광지가 아니다보니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크게 빠르지 않았다.

우선 오키나와의 소바를 먹어보기로 했다. 사람들의 소문을 덜 탄, 한산한 곳으로 들어가 자판기에서 음식을 고른 후 동전을 넣은 후 티켓을 구매했다. 낯선 주문 방식이었지만 일본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담담하게 내놓인 소바는 뭐랄까, 면식을 즐기는 나로서는 크게 인상적이지 못했다.

심심한 맛에 찰기 없이 툭툭 끊어지는 면발 그리고 미지근한 온도의 국물. 잔치국수 국물에 우동면을 넣고 물을 부은 후 십여 분 식혀서 내온 맛. 그만 소바를 남기고 말았다.

국제거리에서 바로 연결되는 제 1 마키시 공설시장으로 갔다. 이곳은 미군 주둔 이후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도깨비 시장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먹을거리와 생필품들을 판매하는 ‘오키나와의 부엌’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파장이 가까워진 듯 내부는 정리하는 분위기였다. 구석으로 들어가니 생선을 파는 집이 있었는데 간이의자를 두고 회도 포장해서 팔고 있었다. 소바를 남겼기에 간단하게 포장된 회를 집어 들었다. 연어와 한치, 문어와 돔 등이 조금씩 가지런하게 포장된 회의 가격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있던 한 서양인은 혼자 먹기엔 다소 많은 양을 시키고선 쩔쩔매고 있었고 아시아 생활을 충분히 경험한 듯 먹던 젓가락으로 나에게 회를 덜어주려고 했다.

맥주와 회 한 접시. 오키나와의 성찬. 나야말로 충분했다. 밤 시간 숙소로 돌아오는 파라다이스 거리에는 가로등 사이로 비가 흩날렸다. 우산이 없었지만 사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아무런 필터링 없이 그대로 땅 위로 내리는 비.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던 사이 비는 강도를 조금 높였고 사방은 비가 스며든 흙의 냄새와 함께 아직 날아가지 못한 여름 꽃의 향기를 조금 내어 주었다. 어디선가 계절을 지나간 백합 향기가 퍼지고 있었다.

류큐의 심장, 슈리성

아침 일찍 서둘렀다. 호텔의 커튼을 젖히니 파란 하늘이 먼저 들어왔다. 비온 뒤의 남쪽 하늘 그리고 멀리 북태평양을 두고 있는 오키나와. 밥 말리의 ‘Stirit up’이 저절로 흥얼거려졌다.

슈리성은 모노레일의 맨 마지막 역에 위치하고 있어 찾아가기가 쉬웠다. 도시 한가운데를 천천히 지나며 강 위를 달리고 빌딩 사이를 지나는 모노레일은 오키나와가 가지고 있는 여유로운 그림 중 하나였다. 문화유산구역답게 역에 내려 걸어가는 동안 단 한 점의 쓰레기도 보지 못했다.

오키나와 사람들 전체가 슈리성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슈리성은 14세기 말에 축조된 오키나와 특유의 산호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성으로 과거 류큐왕국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나하 시내에서 가장 높은 구릉에 있기 때문에 오키나와 시내를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물론 멀리 바다도 보인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 아닌 정치와 의식을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성을 감싸고 있는 외벽에서는 그다지 큰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의 땅이었다. 류큐왕국은 독립국가로서 14세기 초에 시작돼 1879년 멸망할 때까지 이 땅의 주인이었다.

그래서 오키나와는 류큐의 바탕 위에 세워진 일본식 이름으로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일본 남단의 한 섬보다는 류큐의 후손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전쟁 당시, 본토 일본은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을 막아내는 과정에 있어서 오키나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내몰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본토 일본이 자행한 전쟁에 의도치 않게 참여하게 돼 무고한 목숨을 희생해야 했다. 전쟁 당시 사망한 오키나와 주민들의 숫자는 4분의 1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그 저항감으로 공식석상에서 아직도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그러한 대표적 인사다.

입구인 슈레이문를 통과하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소노향 우타키이시몬이 보인다. 몇 번의 전쟁 와중에 슈리성 전체가 네 번이나 불타 소실됐지만 온전하게 살아남은 것은 이 석문뿐이라고 한다.

류큐의 국왕은 성 밖으로 행차를 나갈 때, 귀성의 안전을 이곳 석문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이곳까지는 무료로 개방되지만 진정한 슈리성은 이 너머에 있다.

표를 끊고 성내부로 들어가면 웅장한 건물이 압도적인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슈리성을 대표하며 류큐 왕국 최대의 목조건물인 이곳은 신앙과 주거, 행정과 외교가 혼재돼 있는 본전으로 중화권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온통 강렬한 붉은색으로 장식돼 있다. 본전 내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사람들은 모두 조용하게 나무틀로 짜인 복도를 걸으며 슈리성을 감상했다.

대부분 내부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었지만 바깥 풍경과 옥좌만큼은 허용됐다. 내부 안뜰에는 작은 정원도 있고 관리인들은 오키나와 전통 의상을 단정하게 입은 채 안내에 참여했다.

세세한 곳에서 오키나와를 소개하고 류큐를 설명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과 자세가 부럽기도 했다. 그들은 분명 류큐왕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슈리성에서 애써 많은 것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네의 궁궐과 고즈넉한 사찰과의 비교도 무리다. 그저 류큐의 뜰을 거닐듯 돌아보기. 그것이면 슈리성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킨죠우초 돌다다미길

당시, 주로 여성들만 사용했다는 슈리성 북쪽 문으로 나왔다. 소롯한 슈리성 성벽의 외곽을 따라 나오면 킨죠우초 돌다다미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우거진 나무 사이로 진입하는 고즈넉함과 다다미처럼 짜인 돌바닥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매년 일본 내 ‘걷고 싶은 길 100선’에 든다고 한다. 약 500년 전에는 류큐시대 귀족들의 저택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에는 10km정도였던 길이 현재는 280m 남짓만이 남아 있다.

복잡하지 않은 풍경에 그런 비슷한 감정이 더해지면 우리는 그것을 보통 차분하다고 한다. 오키나와 특유의 현무암으로 포장된 그런 차분한 길은 운치에 서정을 더한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마치 터널처럼 우거져 있는 돌담길 입구는 가을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면 단풍으로 물들어 이 길을 황금과 적록의 터널로 다시 꾸밀 것이다. 잠시나마 담양의 죽녹원이 연상되는 길. 그곳의 바람을 이곳 어디에선가 찾았던 것 같다.

내리막길을 따라 전통가옥들이 유지되고 있었고 어떤 집에서는 어린 꼬마들이 놀고 있었다. 녀석들은 한참 동안이나 보고 있던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노는 것에만 열중했다. 킨죠우초에 유일하게 있는 마다마 찻집으로 들어갔다.
 나하 시내와 오키나와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 맥주와 흑설탕 푸딩을 시켰다.

오리온 맥주는 유독 술을 좋아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이 사랑하는 맥주로 한 해에 일억 병이 넘게 팔리지만 오키나와에서 90%가 소화돼 본토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맥주라고 한다. 맛이 깔끔하고 목 넘김이 시원한 맥주로 맥주의 정의에 알맞은 맥주이다. 흑설탕 푸딩은 나에게 앞으로 푸딩이라는 신세계를 열어준 음식으로 자리할 것이다.

푸딩이라는 것이, 특히 마다마 찻집의 흑설탕 푸딩이 이토록 달콤하며 부드럽고 매력적인 맛인 줄은 미처 몰랐다. 흑설탕 푸딩도 분명히 입 속에서 아이처럼 놀았다. 흑설탕 푸딩과 오리온 맥주 그리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돌다다미길 옆 마다마 찻집. 어쩌면 수리성 관람을 빨리 끝내고 이 시간을 더 즐겨도 좋지 않을까. 오후 다섯 시에 문을 닫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tip>
돌다다미길의 경사는 의외로 급하고 비가 오면 꽤 미끄럽다. 운동화 착용은 필수. 내리막길이기에 다시 슈리성으로 되올라오는 루트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다 내려온 후 큰 길에서 다시 지하철역까지는 우선 거리가 꽤 멀고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다. 택시를 추천한다.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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