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DJ) 김영삼(YS) 두 전직 대통령들이 연말을 기점으로 장외 보폭을 넓히고 있다. DJ는 연초 스케줄이 이미 꽉 차있고, YS도 지난 26일 맞은 76회 생일 만찬을 시작으로 행보를 본격화했다. 총선을 4개월 앞둔 시점이라 정치권에서는 두 전 대통령의 움직임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본격적인 ‘막후 정치’에 나선것 아니냐는 시각과, 애써 정치적 중립을 과시하겠다는 관측 등으로 엇갈린다. 여야 대치를 축으로 총선구도가 한층 복잡해지는 양상에서 두 전직 대통령의 총선 셈법과 향후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지난 26일 김영삼(YS) 전대통령은 서울시내 한 음식점에서 ‘상도동 사람들’과 생일 만찬모임을 가졌다.송년회를 겸한 이날 모임에는 YS시절 전직각료들을 포함해 측근 20여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권양자 전정무장관, 박종웅 의원, 정종욱 전외교안보수석 등을 비롯, 전청와대비서관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YS의 둘째 아들인 김현철씨의 총선출마, 김혁규 지사의 한나라당 탈당 등의 상황에서 YS가 모처럼 옛 동지모임을 마련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치적인 해석을 낳기에 충분하다는 게 정치권의 평가다.YS는 이 자리에서 “주변에서 노 후보를 찍었던 사람들도 지금은 후회하는 사람이 많더라” 며 최근의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으로 참석자들은 전했다. K 전청와대비서관은 “김 전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연금에서 풀려 이민우 총재를 당선시키고 선거혁명을 이뤄낸 지난 85년 2·12 총선을 회고했다”며 “그때 그 열기를 그리워했다”고 전했다.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은 이와 관련 “의미심장한 대목”이라며 “잘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YS는 최근 부산과 영남지역을 연이어 방문하고 있다. 마산과 거제를 찾은 것만 해도 올들어 세 차례다. 지난 11월 방문 때는 김혁규 전지사와 황철곤 마산시장, 배한성 창원시장, 이태호 거창군수가 YS와 함께 했다. 당시 이덕영 정무부지사가 주최한 오찬은 비공개로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때문에 현철씨의 선거지원 성격을 띠고 있지 않느냐는 지역 여론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앞서 지난 10월에도 1박2일 일정으로 부산을 방문, 노무현 대통령이 자청한 국정혼란을 심각히 우려해 주목을 받았다. 당시 YS는 서구 한 음식점에서 문정수, 홍인길 전 의원 등 민주계 인사들과 점심 모임을 가졌다.정가주변에선 정국혼란과 맞물린 내년 총선을 앞둔 미묘한 시점이라는 점을 들어 YS의 부산 경남지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회복을 위한 포석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YS가 지원하는 가장 유력한 인사는 아들인 현철씨. 거제출마가 확실한 현철씨는 이미 2선인 한나라당 김기춘 의원이 지역구 양보 의사를 밝혀 고무된 분위기다.이 지역에는 장상훈(44) 열린우리당 거제시지구당위원장과 나양주(38) 민주노동당 거제시지구당위원장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부산 경남지역 외에서 움직이는 상도동 주니어 그룹도 관심사다.

이들의 공통된 입장은 YS의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채 ‘홀로 서기’를 시험해 보고 있다는 것이다.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지내고 16대 총선에서 입문한 정병국씨는 고향인 양평에서 재선을 노리고 있다. 정 의원은 “문민정부 시절의 그늘을 벗어나 차세대 정치인으로서 지역민들에게 자리잡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다. 김 전대통령의 통역을 맡았던 박 진 한나라당 대변인도 서울 종로구 수성을 노리고 있다. 이 지역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인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의 출마여부도 관심거리다. 김대중(DJ) 전대통령도 지난달 초 ‘김대중 도서관’ 개관 이후 행동반경을 넓히고 있다.지난 10일에는 `노벨 평화상 수상 3주년을 기념해 국민의 정부 시절 각료들과 외식을 함께 했고, 15일에는 춘사 나운규 영화제에 직접 참석해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더구나 최근 DJ는 동교동 도서관 집무실에서 국내외 주요 인사들과도 자주 면담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새해 첫날인 1일 오전에는 국민의 정부 시절 수석비서관과 각료를 역임했던 인사들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해 다과를 함께 하고, 오후에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인사 100여명으로부터 합동 세배를 받는다.DJ측은 “퇴임후 첫 새해를 맞아 과거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들에게 집을 개방하기로 한 것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말했다.이들 전직 각료나 수석비서관, 비서관 가운데는 현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맡고있는 인사도 있고,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는 인사들도 상당수에 달한다.김 전대통령은 또한 내달 5일에는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와도 만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김 전대통령의 김한정 비서관은 “최 대표가 단식기간 김 전대통령의 위로 전화에 대해 감사의 표시로 방문의사를 표시했지만 연말이라 시간이 바빠 연초로 일정을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김 전대통령은 내달 11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가 끝난 뒤 새 지도부가 구성되면 이들과 면담을 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민주당의 11·28 전대이후 조순형 대표, 추미애 상임중앙위원등 지도부의 예방을 받고 “민주당원들은 현명하다”고 말해 `DJ의 의중은 ‘민주당’ 아니냐는 관측을 낳기도 했기 때문에 같은 뿌리인 열린우리당이 전대를 끝낸 후 면담요청을 해 오면 거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한 측근은 “당시 민주당 지도부를 만나 모범적인 전대를 치른 것을 치하한 것일뿐 지지 의사를 밝힌 것은 아니다”면서 “열린우리당이 지도부를 선출해 면담을 요청해 오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DJ측은 일각의 정치행보 시각에 대해 “정치적 행보와는 전혀 무관하다”면서 “국가의 원로로서 남북문제에 남은 여생을 봉사하겠다는 것이 김 전대통령의 유일한 소망”이라며 정치적 해석을 일축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들이 총선을 4개월 앞두고 있는 정치권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특히 연말부터 눈에 띄게 활발한 발언과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DJ-YS가 노무현 대통령을 반공개로 비판하고 나서면서 여야 대치를 축으로 한 정치구도는 한층 복잡해지는 양상이다. 이들이 이미 무시하기 힘든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고 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정치권에선 이제 정치적으로 ‘사망’ 상태인 이들 전직 대통령들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데는 여야 지도부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영남권과 호남권에서 확실한 후계세력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과거에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집권했던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라며 “정치적 기반의 확대가 절실한 여야 지도부로선 어떤 형태로든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 아니냐”고 풀이했다.

그러나 “두 전대통령의 결정이 계파 인사의 총선출마에 큰 고려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양측이 재결집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지만 ‘양김정치’의 부활은 두 사람의 의도와 관계없이, 현실성이 적을 것이란 시각도 많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모두 고질적인 지역구도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 주변에선 여야 지도부가 각각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으면서도, 실제 정치행위는 지역구도의 온존을 전제로 특정지역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양상이 아니냐는 비판론이 적지 않다. 이런 다툼의 와중에서 이미 국민적 심판이 내려진 전직 대통령들이 다시 나설 수 있게 됐으며, 자칫 구시대 정치의 부활로 이어질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우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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