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 모아 대출까지 받아 샀는데 사기!

본 사진은 특정기사와 관계없음 <뉴시스>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서울경찰청 사이버안전과는 지난 25일 해외에서 출시되는 ‘피규어’를 구매 대행해 준다고 속여 거액을 가로챈 고모(36·남)씨를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고씨는 2013년 8월 29일부터 올해 5월 27일까지 피규어 판매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를 개설하고 일본, 홍콩 등 해외에서 피규어를 구매해 국내에 되파는 영업을 했다. 고 씨는 고가의 피규어 구매를 요청한 ‘키덜트족’ 박모(36)씨 등 207명을 상대로 구매를 대행해 준다고 속여 332차례에 걸쳐 총 1억1700만 원 상당을 가로챈 혐의를 받았다. 국내 한 대형 인터넷 쇼핑몰 자료에 따르면 피규어 시장은 2013년 이후 해마다 50% 이상 규모가 성장하고 있다. 올해 매출은 이미 전년도 수준을 넘어섰다. 피규어 판매 사기로 인한 피해 건수도 증가하고 있다.

제작기간 있어 배송 오래 걸려도 의심 안 해

싸게 준다면 의심하고 공식 사이트 이용해야

경찰에 따르면 고 씨는 사업확장 실패와 도박에 빠져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됐다. 가로챈 돈 모두 홍콩, 마카오 등 해외에서 원정 카지노 도박으로 탕진했다. 고 씨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할인 행사와 이벤트를 통해 모집한 고객에게 선결제로 받은 피규어 구매대금으로 기존 고객이 주문한 피규어를 구매해 배송하는 ‘돌려막기식’ 영업으로 사이트를 운영했다. 그러나 해외 카지노 도박에 빠진 고 씨는 돌려막기식 영업마저 힘들게 되자 피규어 사기를 벌였다. 피규어는 해외 구매·주문제작 형태로 구매가 가능해 주문 후 제작·배송까지 수개월이 소요된다는 점을 악용했다.

사기 당한 ‘키덜트족’

이들은 누구?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 박 씨 등 207명은 장기간 피규어를 수령하지 못했지만 고 씨가 제작이 지연돼 배송이 늦어진다는 답변에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며 “고가의 피규어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마니아층으로 자신이 원하는 특정 피규어에 대해 금액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구매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고 말했다.

‘키덜트(kidult)’는 키드(kid)와 어덜트(adult)의 합성어로 20~40대의 어른이 됐음에도 여전히 어린이의 분위기와 감성을 간직·추구하는 성인을 일컫는 말이다.

한때 이들은 책임감이 없고 보호받기만을 바라는 ‘피터팬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애니메이션, SF영화 등 특정 취미·사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나 다른 분야의 지식이 부족하고 사교성이 결여된 인물을 말하는 ‘오타쿠(otaku)’라는 말로 표현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키덜트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면서 각박한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마음 한구석에 어린이의 감성을 유지하는 사람들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피규어’는 영화나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실제와 같이 정교하게 제작된 장난감이다. 소장 가치가 높아 동심을 유지하는 키덜트족이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까지 지불해 구입하고 있다. 한정판 등 희소성이 있는 제품의 경우 정상가격의 수배에 이를 정도로 거래되기도 한다.

피규어를 수집하는 키덜트족의 특징은 무엇보다 진지하고 무거운 것 대신 유치하고 재미있는 것을 추구한다. 한 가지 예로 대학생이나 직장인들이 ‘엽기토끼’ 같은 인형을 가방이나 핸드폰에 매달고 다니는 것, 회사 책상 위에 인형 등을 올려놓는 것 등이다. 키덜트족은 이를 통해 얻은 영감이나 에너지가 일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활이 정서 안정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긍정적인 의견들이 나오면서 키덜트족 특유의 감성이 반영된 트렌드 제품이 유행하고 있다. 기업들은 키덜트족을 타깃으로 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엔터테인먼트 쇼핑몰과 온라인 쇼핑몰도 쇼핑과 놀이를 동시에 즐기려는 키덜트족의 욕구를 적극 반영하고 있는 추세다.

<뉴시스>

주문한 지 1년

내 제품은 어디에…

또 다른 사례로 키덜트족 박모(가명)씨는 인터넷 피규어 판매 사이트에 신제품으로 출시된 ‘트랜스포머 오토봇 드리프트’ 제품에 정신이 팔렸다.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제품인 데다 다른 사이트보다 30% 저렴한 가격에 출시돼 우선순위에서 밀려 제품을 못 살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에 휩 싸였다.

3종류에 500만 원이나 하는 고가 상품이다 보니 직장인 박 씨는 지난 6개월 동안 용돈을 모으고 일부는 대출까지 받아 결국 구매를 결정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하지만 해당사이트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제작과정이 오래 걸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제품은 배송될 기미조차 없었고, 그는 사이트에 공지된 번호로 수십 통의 전화를 했다. 그때마다 판매사 대표 김모(46)씨는 “1주일만 기다려 달라”, “배송이 늦어지고 있다”고 둘러댔다.

피해자 박 씨는 지난 1년을 돌이켜 보니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사이트에서는 무조건 현금만 취급했으며 정확한 배송일을 명시하지 않은 데다 무엇보다 가격 자체가 중고거래만큼 현저히 낮았다.

서울 도봉경찰서는 김 씨를 사기 혐의로 지난 2월 25일 구속했다. 또 그의 아버지(74)를 사기 방조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아버지 김 씨는 인터넷 피규어 판매 사이트 대표자로, 아들의 사기범행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통장과 휴대전화를 제공해 아들의 사기 범행을 도운 혐의다.

경찰에 따르면 아들 김 씨는 2013년 1월부터 2016년 1월까지 같은 수법으로 적게는 수십만 원부터 많게는 5800만 원까지 1655명으로부터 총 17억4000여만 원을 가로챈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구매대행 전문가

“신중한 결정·정보 필요”

구매대행 전문가이자 한 피규어 판매업체 직원인 최모(37·가명)씨는 “현금 결제 시 싸게 해주겠다는 곳은 의심부터 해야 한다. 특히 피규어 시장의 급성장에 따라 장기간 기다릴 수 있는 키덜트족의 특성을 노려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만큼 구매 전 신중한 결정과 정보가 필요하다”며 “돈을 더 지불하더라도 개인 사이트보다는 공식적인 판매 사이트를 이용하고, 구입 전 전화, 홈페이지 고객센터 등 문의를 통해 전체적인 사항을 확인한 후 주문하는 편이 유리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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