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이 끝을 맺었다?’미국이 14일(한국시간) 사담 후세인(65) 전 이라크 대통령을 체포했다고 15일 공식 발표했다. 지난 5월 1일 부시대통령의 이라크전 종전선언 이후 7개월만에 이뤄진 후세인 체포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최고의 수확이다. 특히 부시는 걸프전 당시 후세인을 제거하지 못해 후회했던 아버지의 원까지 풀어주었다. 후세인 체포로 막을 내린 부시 미 대통령 가문과 후세인의 2대에 걸친 악연을 짚어봤다. ‘악의 축’, ‘독재자’, ‘미국에 대항할 아랍의 영웅’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거론할 때 붙는 수식어들이다. 극명하게 대조되는 이 수식어들은 모두 미국과 관계가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미국은 후세인을 세계평화를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봤고, 아랍권은 미국에 대항할 지도자로 후세인을 평가했다.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이라크의 최고 권좌인 대통령에 올라 절대적인 권력을 행세한 후세인. 많은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그가 이렇게까지 성장한데는 미국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지적한다.

■후세인은 미국이 만든 ‘프랑켄슈타인’

실제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해 말 경 후세인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미국이 어떻게 후세인을 만들었나’라는 내용을 자세히 실었다. 당시 뉴스위크는 “미국이 이란 혁명정권을 위축시키기 위해 후세인 정권에 세균전 기술까지 제공했다” 며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민간인 특사였던 도널드 럼즈펠드 현국방부장관이 83년 12월 20일 바그다드를 방문, 후세인과 정중히 악수까지 나눴다” 고 전했다.사실 후세인은 걸프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미국은 지난 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의 회교혁명이 일어나자 이란을 견제할 파트너로 후세인을 선택했다. 이후 후세인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로 중동의 실권자로 부상했고 미국으로부터 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와 군사적 지원을 받아 8년 간의 이란-이라크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 이라크 내 민족적·종교적 내부갈등을 유혈로 풀며 독재적 지배력을 높였지만 미국은 이에 침묵했다. 결국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후세인은 자신들이 만든 ‘프랑켄슈타인’이 된 꼴이다. 그러나 90년 쿠웨이트 침공과 걸프전이 후세인과 미국이 결별하게 된 배경이 됐다. 부시가(家)와 후세인의 악연도 바로 걸프전에서 비롯됐다.

후세인이 지난 90년 석유이권 문제를 둘러싸고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 H 부시 전대통령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응징하기 위해 지난 91년 1월17일 걸프전을 개시하면서 12년 간의 악연이 시작된 것. 부시는 첨단 무기와 대규모 공습을 동원해 개전 한달 여만에 후세인의 항복선언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부시는 후세인을 제거하지 못했다. 또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이후 재선고지에서 빌 클린턴 전대통령에게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이것이 천추의 한이 됐는지 부시는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쉽게 미워하지도 않지만 후세인은 정말 증오한다”는 묘한 여운이 담긴 말을 남겼다. 반면 후세인은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자신의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후세인은 걸프전에서 미국의 맹폭에도 살아남았고 이스라엘에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후세인은 아랍권에서 십자군 전쟁 당시 90여년 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라크의 왕 살라딘과 비교 평가받았고, 아랍세계에서 미국에 대항할 영웅으로까지 부상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오늘의 후세인을 탄생시킨 것이며 부시 전 대통령은 이에 일조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잇단 공습에도 꿋꿋이 건재를 과시하던 후세인은 2000년 또 다른 부시 2세를 만나면서 굴욕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이번엔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돼 숙적관계가 된 것. 조지 W 부시 현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대북문제와 아랍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다. 특히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인 2002년 1월29일에는 후세인이 통치해온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후세인에 대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대해 후세인도 부시를 아랍을 지배하려는 패권주의자로 규정하며 응수했다. 이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수면위로 급부상했고, 부시는 결국 지난 3월17일 후세인에게 48시간 내에 이라크를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내년 대선 승리가 진정한 승부?

그러나 후세인이 이를 거부하자 부시는 3월20일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은 첨단무기를 동원한 융단폭격을 통해 개전 43일만에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시는 5월1일 전투기로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 갑판에 착륙한 뒤 조종사 차림으로 나와 전쟁 승리자인 양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쇼’까지 선보이며 이라크전 종전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후세인은 지하세계로 은둔생활을 하며 자신을 기필코 제거하려는 부시의 추격을 피해야 했고 지난 7월22일 두 아들 쿠사이와 우다이를 미군 폭격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쫓기는 신분이었지만, 후세인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끝까지 항전의지를 불태우며 이라크 내 저항세력을 부추겨 이라크 내부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실제 미군은 폭탄테러 등으로 전쟁당시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고 자국내 여론도 악화돼 부시에 대한 지지도는 연일 곤두박질쳤다. 상황의 반전을 위해 부시는 추수감사절 날 전격 이라크를 방문해 현지 장병들과 칠면조를 함께 먹는 “쇼”를 다시 연출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걸프전에 승리하고도 재선에 실패했던 아버지의 전철을 다시 밟는 게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됐다. 그러나 상황은 다시 급변했다. 이란과의 전쟁, 걸프전, 그리고 잇단 미국의 공습에서도 살아남았던 후세인이 자신의 고향마을 티크리트 근처의 한 농가에서 13일 전격 체포된 것. 이로써 길고 길었던 부시가(家)와 후세인의 질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으며 일단 부시가(家)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특히 덥수룩한 수염과 초췌한 모습으로 체포된 후세인은 의기양양했던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300억원에 가까운 포상금도 자신의 두 번째 부인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커 후세인의 비애감은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아버지가 그토록 후회했던 후세인 제거에 성공한 부시는 그 동안 지지부진했던 지지도가 급반전하는 계기점을 마련했다. 그러나 부시는 아직 승리의 축배를 마시기에는 이르다. 후세인 사후처리에 대한 문제, 전쟁의 정당성 논란, 이라크 내 저항세력 문제가 여전히 부시의 앞길을 괴롭힐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특히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라크 전후처리 문제는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결국 부시가(家)의 진정한 승리는 향후 대선에서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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