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이 전총재가 아니라 한나라당인데…” 이 전총재의 한 측근이 전한 말이다. 서정우 변호사의 구속으로 궁지에 몰린 이회창 전총재의 측근들은 불법대선자금 모금사건과 관련해 대부분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도 한나라당이 당차원에서 보호를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표출했다. 지난 대선 당시 부국팀에 소속됐던 멤버들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 같다. 이 전총재의 옥인동 자택을 찾아가기도 부담스런 상황이다. 대선 당시 이 전총재의 측근으로 분류됐던 한 인사는 “이 전총재가 조만간 결단을 내리지 않겠냐”며 입장표명이 불가피한 상황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 인사는 “이 전총재가 고해성사를 한다고 해도 수사표적은 한나라당이기 때문에 이 선에서 끝나진 않을 것”이라며 “당이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보고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총재의 옥인동 자택은 연일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북적대는 대문 밖 상황과는 달리 대문 안은 ‘고요’ 그 자체다. 취재진을 의식한 듯 이 전총재는 며칠째 ‘두문불출’하고 있다. 한 측근은 “생각을 정리하고 계신 것 같다”며 “입장표명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이런 상황에서 뭘 감추려고 하겠느냐” 며 “직접 원고를 쓰실 것이고, 전반적인 내용들을 다 공개하게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이처럼 이 전총재가 마음의 결단을 준비하게 된 데에는 서정우 변호사가 구속된 이후 당 안팎으로부터 거센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안팎에서 들끓고 있는 ‘창책임론’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미 최병렬 대표는 ‘창책임론’을 공식 언급한 상태다. 최대표는 “대선자금이야 당에서 파악한다고 치더라도 (부국팀 등) 외곽조직 부분은 이 전총재가 나서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지도부도 최대표와 뜻을 같이하고 있는 분위기다. 최근 옥인동을 직접 방문한 홍사덕 원내총무도 ‘결자해지’를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가 만난 당중진 의원들도 대체적으로 “이 전총재가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밝혀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이 전총재의 입장표명이 당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한 중진의원은 “이러다간 당이 두 동강 나게 생겼다”며 “기획된 편파수사라는 생각은 들지만, 총선을 앞둔 당의 진로를 위해 이 전총재가 직접 나서줘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중진의원도 “검찰의 칼날이 한나라당 목 밑까지 와 있다”며 “목을 베기 전에 이 전총재가 먼저 다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안팎에서는 ‘창책임론’이 급속도로 확산돼 가고 있다. 이 전총재의 측근인사들마저도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익명을 전제한 한 측근인사는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 다니고 있는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라며 “당차원에서 적극 대응해야 하는데 이 전총재 책임론으로 몰아가니까 우리까지 입장이 곤란해져가고 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이 측근은 “총재를 보좌했던 상당수 사람들이 총선을 준비하고 있는데, 창측근이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돌고 있어 이래저래 힘든 상황”이라며 “총선 출마를 아예 차단시키자는 의도라는 생각 밖에 안 든다”고 전했다. 지난 대선 당시 이 전총재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상당수 인사들은 일찍부터 총선출마를 준비해 왔다. 이들 대다수가 배지를 달지 않은 정치신인들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이들은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편파수사’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인들의 도전을 차제에 차단시켜 내년 총선에서 기를 못펴게해 한나라당을 무력화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하고 있다. 때문에 측근인사들은 당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을 못 마땅해하고 있다.

목표는 이 전총재가 아니라 한나라당인데 당지도부가 상황인식을 잘못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변호사가 구속된 이후 이 전총재는 부쩍 야위어 가고 있다. 담담하고 의연하게 측근들을 만나곤 있지만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안풍, 세풍 사건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 측근인사는 전했다. 서변호사는 검찰에 긴급체포 되기 직전 이 전총재를 만나 대선 자금에 대해 대략적인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변호사는 이미 이 전총재를 만나 LG와 삼성, 현대자동차로부터 불법자금을 받아 당에 전달했다는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서변호사는 검찰소환이 이미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이 전총재를 만나 돈받은 기업을 말하고, 액수까지 대략 얘기했다는 후문이다. 이 전총재가 너무 놀랄 것을 우려, 정확한 액수는 말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이 전총재는 서변호사에게 “어떻게 자네가 구속되는 것을 보겠는가. 차라리 내가 처음부터 지시했다고 말하고 (검찰에) 들어갈까”라는 말까지 하면서 서변호사를 위로했다고 한다. 서변호사는 이 전총재의 측근 중 최측근이다. 기업들이 자금전달자로 서변호사를 지목한 것도 그 때문. 한 측근인사는 “서변호사의 구속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고 계실거다”며 “들어가면 자기가 들어가야 한다는 말까지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서변호사도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감출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전총재가 오랜 칩거를 깨고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으로 관측된다. 이 전총재는 부인 한인옥 여사와 함께 명륜동 본가로 모친 문안인사를 가기 위해 모습을 나타냈다. 하지만 취재진들 때문에 매주 한차례씩 가는 문안인사는 가지 못했다. 이 전총재는 현재 검찰수사를 ‘정치보복’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표적은 자신이 아니고 한나라당이기 때문에 당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측근들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총선때 한나라당을 무력화시키고자하는 의도가 짙은 수사라는 것이다. 이 전총재는 옥인동을 줄이어 방문하고 있는 측근들에게 이같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결코 피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검찰소환까지도 각오하고 있다고 한 측근인사는 전했다. 한 측근인사는 “이미 정계를 은퇴했고,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모든 걸 다 털어놓을 것이다”며 “이 전총재는 지금 자포자기 상태나 마찬가지다”라고 전했다. 검찰조사를 받고 있는 서변호사는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이 얼마인지를 속속 털어놓고 있다. 현대차그룹으로부터 지난해 11월 중순 50억원씩 2차례에 걸쳐 모두 100억원의 불법자금을 받았다고 시인한 상태다. 또 서변호사는 삼성과 LG그룹에서 각각 112억원과 150억원의 불법대선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이미 인정했다.

서변호사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정가 주변에서는 불법대선자금 파문증폭에 따른 이전후보측의 공식 대응이 시작된 게 아니냐는 관측이 일고 있다. 최근 한나라당 최병렬 대 표의 고해성사 압박에 대한 이 전 후보측의 대응 전술이라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실제 최대표는 “당에서 자체적으로 파악해 불법대선자금 실체를 공개할 것”, “필요하면 검찰에 자진출두해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발언, 이 전총재측의 자진공개를 압박해 가고 있다.이 전총재측과 현지도부간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변호사는 받은 돈을 당에 입금했다고 당으로 ‘공’을 던지면서 ‘창책임론’에 맞대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양측간 이러한 갈등은 당내부에서부터 표출되고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