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대리대사, 국가재건 최고회의에 관한 미국 우려 표명

군사정부 합법화 문제, 한미 양국 주요 관심사 급부상

“군사정부의 합법화 문제는 한미(韓美)양국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했다.(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부의 계속성 문제는 윤보선 당시 대통령이 집무를 계속함으로써 해결됐고 미국으로서는 군사정부를 인정하거나 승인을 유보한다는 결정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윤 대통령은 한 때 사임했으나 미국과 한국 측의 압력으로 다음 날 결정을 번복해 다음해까지 합법성 문제를 가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때까지 미국 정부는 쿠데타 지도부와의 상대를 자제했으며 혁명위원회가 임명한 외무부 관계자와 외무장관과의 접촉을 유지했다.

그러나 6월 9일 마샬 그린 대리대사가 쿠데타 지도자인 박정희와 만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같은 조치의 정지작업은 전 국방장관 김정렬이 맡았다.

첫 만남은 국가재건 최고회의 명목상의 의장인 장도영을 먼저 만난 뒤 이루어졌다.

그린 대리대사는 두 사람에게 전날 국무부로부터 받은 훈령에 따라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전달했다.

1. 미국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미국이 우호적인 토대 위에서 협력할 용의가 있는 기존 정부로 간주한다 2. 5월 16일에 발표된 혁명공약을 환영한다 3. 한국민과 양국의 공동이익에 부합하는 결실 있는 관계를 희망한다 4.신임 새뮤엘 버그 대사가 부임하면 경제원조를 비롯한 협력방안을 논의한다 5.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성명을 환영한다.

이와 함께 그린 대리대사는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성격, 의도, 방법론”에 관해 미국이 우려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같은 방문에 이어 그린 대리대사는 워싱턴에, 군부 지도자들이 때로 미국의 충고를 무시했으나 이제 어느 정도 영향력이 행사되고 있다고 보고하고 약간의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교섭의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므로 너무 밀착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보고했다.

최고회의가 취한 몇 가지 조치는 미국 측의 관측 대상이 됐다. 6월 13일 중앙정보부가 쿠데타 브레인으로 간주되던 당시 김종필 대령의 주도하에 창설됐다. 7월 초에는 장도영이 권력투쟁 후에 사임했다.

7월 중순 버그대사는 박을 두 번째 방문한 후 민정 복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 당국은 박의 정권을 지지하고 싶지만 체포, 숙청 등이 계속 되는 한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이 말에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한국정부는 좌익활동 혐의를 받은 사람들을 포함해 1천 2백93명에게 사면 조치를 내렸다.

민정 복귀 약속을 이행하는 데는 그후 2년반 동안 꾸준한 미국의 압력이 있었다. 이 기간은 혁명위원회 내의 권력투쟁과 정책 대결로 점철됐다.

민족주의적인 주장은 때로 미국인에 대한 적의와 미국의 조언을 수락하지 않으려는 형태로 나타났다. 군부내의 기성 정치인에 대한 반감은 깊은 뿌리를 가졌고 이 때문에 젊은 장교들은 민정 복귀를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미국과의 사전 협의나 심지어 통보도 하지 않은 일련의 조치들이 양국 관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61년, 62년의 혁명재판, 중앙정보부의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주식시장 개입, 정치 정화법, 울산공단 조성 결정, 화폐개혁 등이었다.

화폐개혁 문제는 너무나 심각하게 간주돼 라이스 국무부 부차관보가 주미 한국대사를 소환해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사전 협의가 있어야 된다고 경고했다.

점차 김종필 정보부장이 박의 측근으로 미국이 우려한 각종 조치의 배후에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리고 김종필과 송요찬이 권력투쟁에 들어갔다. 미국은 송요찬의 편에 섰으며 박에게, 김이 정치자금을 모으기 위해 시작한 의혹사건에서 손을 떼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그후 송이 사임하고 박이 송의 직책까지도 맡았다.

그러나 6월 21일 버그대사는 박과 두시간 동안의 면담을 토대로 쿠데타 지도부의 위기는 새로운 차원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했다.

박은 다소 흔들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김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버그 대사는 “박은 마지못해 김이 부담이 되고 있으며 김의 권력을 어떻게 약화시킬지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박이 앞으로 미국 측과 여러 문제를 미리 협의하겠다는 언질을 한 것을 근거로 대사는 미국이 한국 측에 대해 압력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으며 “박이 숨쉴 틈을 주고 약속대로 진실성과 능력이 발휘되는지 시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따라 김은 더 이상 대사나 유엔군 사령관의 접촉 창구가 될 수 없었다. 이어 버그 대사는 박에게 김의 너무나 야심적인 활동에 대한 평가를 비밀리에 전달함으로써 김의 몰락을 도왔다. 62년 9월 김종필은 미 중앙정보국(CIA)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버그대사는 김과 서울에 있는 미 대사관 측과의 긴장관계를 강조했다.

버그대사는 김의 매력, 복잡성, 열정, 음모에 대한 재능 등에 대해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성격과 이미지로 인해 김은 위험성을 내포하는 인물이다. 그의 미국 방문은 어느 정도 우리에게도 부담이 되지만 우리는 이번 방문을 통해 그가 직접 워싱턴의 견해와 영향력에 노출될수 있는 기회로 보고 찬성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가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군사정부가 어떤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식토록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주미 한국대사도 비밀리에 사적인 의견으로 그의 미국방문이 한 번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던 그에게 63년 선거의 필요성과 서구의 사고방식을 교육하는 데 활용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은 이 방문을 미국이 개인적으로 자신과 군사정부를 지지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기회로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김은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만난 후 면담 내용을 밝히면서 “미국 대통령과 행정부는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고 한국의 군사정부를 완전히 신뢰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은 한국언론에서 과장되게 보도됐다.

김의 관점을 수정하기 위해서 미국과 한국 관리들이 상당한 노력을 했으나 그의 태도나 입장에 당장 변화가 있다는 시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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