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노인들만 모이는 으슥한 유원지에 가면 속칭 ‘박카스 아주머니’들이 있다. 그들의 손에는 커피믹스와 자양강장제, 개비담배가 들려 있고,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어디에 쓰이는지는 몰라도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비닐 돗자리가 들려 있다. 장기를 두거나 점당 10원짜리 고스톱을 치는 노인들 사이로 그녀들은 심상치 않게 출몰한다.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사람들은 엇갈린 반응을 내놓았다. 황혼의 사랑이 담론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 당혹감으로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서, 당사자들인 노인들은 당면한 현실에 대해서 격렬한 의견을 내놓았다. 영화의 성패여부를 떠나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노년기의 섹스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영화는 사회학적으로 공헌을 한 셈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문제는 다시 잠수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효’ 사상을 바탕에 둔 동방예의지국인 모양이다. 홀로 된 부모님에게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는데 관심을 두기 보다는 싸구려 효도관광에 짐짝처럼 끼워 보내거나, 일 년에 두어 차례씩 육수가 일품인 냉면집으로 모시고 가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한다. 피 끓는 청춘인 자신들의 성생활도 노골적으로 드러낼 형편이 아닌데, 하물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차분하게 정리해야 하는 부모님의 은밀한 사정임에랴.

‘노팅힐’을 만들었던 로저 미첼 감독은 2005년에 ‘죽어도 좋아’와는 다른 각도의 위험한 로맨스를 담은 영화 ‘더 마더’를 발표했다. 딸의 애인을 사랑하는 60대 후반 여인의 이야기였다. 우리가 상상하는 노년의 사랑 이상의 이야기다.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쉬쉬할 판국인데, 자신의 혈육인 딸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다. 목수인 그 남자가 일하는 등짝을 바라보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는다. “괜찮다면…, 빈방에…, 빈방에 나하고 함께 가실래요? 그럴래요?” 그리고 침대 위에서 말한다. “다시는 아무도 나를 만져주지 않을 줄 알았어요. 장의사만 빼면요.”

천인공로할 일이다. 딸이 공을 들이고 있는 남자를 가로채 침대로 끌고 가다니. 친구의 남자도 아닌 딸의 남자를 말이다. 딸과 그 남자의 사이가 어떠했으며, 그녀는 어떤 틈으로 들어갔는지를 따지지는 말자. 논점이 어긋난다. 일흔이 눈앞에 있는 그녀가 불같은 사랑을 느꼈고, 그리고 혈기왕성한 남자와 섹스를 나눴다. 여기서도 삿대질과 박수소리는 엇갈리게 마련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는 데는 복잡한 이론과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권리와 의무가 부여되어 있다. 그것이 상충할 때는 사회적 룰에 따른다. 권리를 포기하는 쪽이 옳다고 판단되면 표면적으로는 대범하게 의무를 준수하는 척하지만 포기한 권리는 내면에 잠복한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권리 중 사랑을 할 권리는 죽을 때까지 보장되어야 한다. 윤리가 부딪칠 때를 제외한다면 노골적이어도 상관없다. 21세기 글로벌 시대다. 노인이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을 손가락질 하는 사람은 없다. 아이스크림처럼 달고 부드러운 사랑을 즐길 권리는 죽을 때까지 상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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