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힘 다해 만든 두 번째 영화다”

하진선 감독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한 여자가 있다. 두 아이의 엄마였지만 모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당시 국내에서는 이혼녀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단다. 그녀가 가장 증오하던 일본으로 떠난 이유다.

그녀는 일본에서 정말 억척스럽게 살았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집을 구하지 못해 여관방을 전전하기도 했고 경찰서를 찾아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한국에 있는 아이들을 데려와 학교에도 보냈다.

없는 살림살이는 아이들 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마련했다. 그러던 그녀가 잊고 있던 꿈을 찾아 나섰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학교에 입학해 졸업과 함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그녀는 첫 작품 이후 10년을 흘려보냈다. 말 못할 속사정이 있었다. 지금부터 하진선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02년 하진선 감독이 입학한 영화학교는 일본 영화계의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가 설립한 학교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1983년, 1997년 두 차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감독이다.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

입학원서 접수 당시 영화학교 측은 그녀의 원서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상황에서 학업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고 입학을 시킨다고 해도 계속 다니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입학 의지를 꺾지 않았다. 신주쿠 거리에 나가 학생 58명에게 입학을 허가해 달라는 서명을 받아 학교에 제출하자 입학을 허락해 줬다. 하지만 3년간의 영화학교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마지막 1년을 앞두고는 경제적인 문제로 결국 자퇴를 선택해야 했다. 

자퇴서를 작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학교를 가던 날, 그녀는 6시간을 걸어서 학교에 도착했다. 교통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녀의 자퇴를 만류하며 일주일만 더 고민해 볼 것을 권유했다. 

일주일을 더 고민했지만 그녀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퇴를 위해 또다시 걸어서 학교를 찾았다. 그런데 그녀는 학교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일주일 동안 학교 교직원들이 그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줄 후원기업을 찾은 것이다.

교직원들의 노력으로 그녀는 일본 철도회사인 오타큐 그룹 사원들의 장학생이 됐다. 십시일반으로 장학금을 모아 준 덕에 무사히 영화학교를 졸업했고 일본에서 한국인 최초의 여성 감독이 됐다.  

군대 간 아들 소재로
첫 영화 제작해 ‘주목’

하진선 감독의 졸업작품이자 첫 작품은 2006년 발표된 ‘URINARA(우리나라)’다. 그녀의 아들인 안유상(당시 20세) 군의 군 입대 과정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다. 당시 안 군은 일본 영주권자로 병역의 의무가 없었지만 군 입대를 선택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군대를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 감독의 다큐멘터리 ‘우리나라’는 당시 일본 전역과 대학 등에서 상영됐다. 전쟁 후 개인주의가 만연했던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군대 소재의 영화는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 결과 국제영화제는 물론 아이치 국제여성영화제 초청작으로 초청돼 상영되기도 했다.

그녀는 이 여세를 몰아 후속작 ‘東京 and KOREA’를 준비했다. 이 역시 군에 입대한 아들이 촬영 소재였다. 그녀는 ‘우리나라’ 촬영 당시 작품의 깊이가 부족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런 데다 한 젊은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내린 선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녀는 국방부로부터 2년 동안 촬영 허가를 받아 촬영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 작품은 10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진선 감독은 지난 10년 동안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 몸과 마음은 피폐해갔고 영화 일은 손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롭게 만났던 한 남자로 인해 그녀는 지난 10년간 세상과 등지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는 소위 말하는 성직자다. 한마디로, 만나서는 안 될 사이였다. 부부의 연을 맺을 수도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한번 맺은 인연은 쉽게 끊을 수 없었다.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정신병원까지 갇히는 상황에 처했다. 서로의 가족이 연결돼 있던 만큼 그 인연은 질기고 질겼다. 

하지만 고통이 너무 컸다. 신뢰를 저버린 행동에 결국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까지 갔다. 그녀의 손을 들어준 법원의 1심 판결로 10년의 암흑기를 벗어날 용기가 생겼다. 그때서야 그녀는 잊고 지냈던 영화가 떠올랐다. 어쩌면 살기 위해 붙들고 싶었던 뭔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무너진 모습을 극복할 것이라는 주변 지인들의 믿음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10년이라는 긴 터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가족을 비롯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두 아이에게 자신에게 스스로 떳떳해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살기 위해
영화 완성에 매달려“

10년 동안 묵혀뒀던 영상을 정리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잊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일에 파묻히는 것만큼 좋은 약은 없다. 몇 달을 일에 매달리니 어느 정도 작품이 완성돼 갔다. 하지만 문제는 또 돈이었다. 편집을 맡겨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하진선 감독은 우연한 기회에 한 교육단체에서 내건 이문화교류관련 수기 모집 공고를 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는 사연을 적어 보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사연이 당선이 됐다. 상금은 우리돈으로 약 100만 원. 비록 적은 돈이었지만 그녀는 당첨금 안내문을 들고 집 근처 편집실을 찾아 다녔다. 

그녀는 허름한 한 편집실을 찾았고 그녀의 작품을 보여줬다. 그녀의 계산대로라면 편집 기간은 최소 20여일이다. 하지만 돈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나이든 담당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직원은 한 푼도 깎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냉정했다.

아쉬움에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본 직원은 돈은 깎아줄 수 없지만 편집기간은 줄일 수 있다며 갖고 있는 돈에 맞춰 일을 하자고 했다. 그녀는 그 직원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다른 곳에서는 그 돈으로 편집을 마무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원은 꼬박 3일을 편집 작업에 매달렸다.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도시락을 먹어가며 편집 작업을 마무리했다. 하 감독은 마지막 영상이 끝날 즈음 눈물이 터졌다고 했다. 잊고 싶었던 10년의 세월이 떠올랐단다.

두 번째 영화
‘사쿠라와 무궁화’

‘우리나라’ 이후 10년 만에 선보인 하진선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은 ‘사쿠라와 무궁화’다. 한국의 군대와 일본의 전통문화 중 하나인 축제를 모티브로 ‘우리’라는 공동체와 ‘민족의식’을 키워가는 모습을 외국인이자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다.

그녀는 지난해 12월 17일 재일한국영사관 내 동경민단중앙본부에서 시사회를 개최했다. 동경 주재 기자들과 기타 미디어 관계자들을 초청했다. 편집 작업을 도와줬던 집 근처 편집실 노인도 초청했다. 

시사회가 진행되는 내내 하 감독은 마음속으로 울었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제야 비로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1심은 이겼지만 항소심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지난날처럼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사쿠라와 무궁화’는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 가족들의 아픔과 고민 그리고 갈등 안에서 사랑과 이해로 화해하는 모습을 담은 휴먼드라마라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았다. 일반 관객들도 일본인들이 생각지 못하는 외국인 가족들의 고민이 담겼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테마였다는 평을 했다. 

또 군대라는 소재가 일본에서는 처음 볼 수 있는 테마다 보니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치있는 영화라는 평도 받았다.

하진선 감독은 이제 인생 3막을 시작했다. 두 번째 영화는 죽을 힘 다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오랜 인고의 시간을 지나 세상에 다시 나온 만큼 카메라에 담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그래서 세 번째 네 번째 작품이 더 기다려진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