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코미디의 별이 지다

지난달 25일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故 배삼룡 씨의 발인식이 끝나자 고인의 운구차량이 장례식장을 나서고 있다. photo@dailypot.co.kr

‘한국의 찰리 채플린’ 고 배삼룡(본명 배창순)이 별이 됐다. 지난 23일 오전 2시 11분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서 향년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7~80년대 구봉서, 서영춘 등과 코미디언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인기를 얻은 그는 국민 바보 캐릭터 ‘비실이’ 연기를 통해 한국형 슬랩스틱을 창시했다. 당시 서민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 벗이자 스타였다. 파란만장했던 배삼룡의 삶을 되짚어본다.

별이 졌다.

7~80년대 구봉서, 서영춘(작고) 등과 코미디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배삼룡이 별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린 그는 평생을 웃음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영화보다 감동적이고 파란만장하다.


창순에서 삼룡으로

배삼룡은 1926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배창순.

그는 춘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큰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우에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국과 정서가 다른 일본에서 그는 연극을 처음 접하며 새로운 문화에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 배우의 꿈을 키우며 45년 8·15광복으로 한국에 돌아온다. 그리고는 자신의 꿈을 키우기 위해 유랑 악극단 ‘민협’을 찾아간다. 이때가 1946년 4월, 그의 나이 이제 갓 20살이었다.

민협에 찾아간 그는 단장에게 “악극을 하고 싶어요. 배창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단장이 “창순이가 뭐냐. 차라리 삼룡이가 낫지”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보통 일반 사람 같으면 기가 죽기 마련. 그러나 삼룡은 달랐다. 그는 특유의 넉살로 “용이 세 마리니 나쁘지 않겠네요. 예명 지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넙죽 인사를 했다. 그의 천부적인 감각을 알아본 단장이 민협에 입단을 허락했다.

당시 악극단은 열악했다. 배역은 고사하고 잔심부름을 하느라 바빴다. 고난의 날이었다. 그는 그 당시를 “가까운 곳에서 나팔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금방이라도 커질듯 했다. 행복했다”면서 “평소 보고 싶었던 악극을 매일 구경할 수 있었고, 배우로서 꿈을 키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입단한지 1년 만에 민협이 망하자 그는 서울로 상경해 유랑극단에 입단한다.

어느 날, 한 배우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의 대타로 무대에 올랐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오른 그는 대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에 또…”라며 더듬거리며 대사를 처리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바보스런 연기에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첫 무대에서 대중에게 스타성을 인정받고 21세의 청년 배삼룡의 ‘비실이’연기가 탄생됐다.

15년간 악극단 생활을 통해 그는 탄탄한 연기력과 무대매너를 갖추며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갔다. 특히 그의 비실비실한 바보 연기는 당시 군사정권의 암울한 시대를 살던 민초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며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그즈음 영원한 콤비이자 단짝 ‘막둥이’구봉서(84)를 만났다. 두 코미디 거장의 만남은 한국의 개그 판도를 단숨에 바꿔 놨다.


인생의 황금기, 구봉서 만나다

1969년 유랑극단에서 MBC TV로 무대를 옮긴다. 그는 구봉서와 함께〈쑈 반세기〉〈웃으면 복이 와요〉등에 출연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기존의 ‘만담 형식’의 콤비 개그에서 벗어나 넘어지고, 코미디 춤의 교본으로 불리는 ‘비실이 춤’을 선보였다. 본격적인 한국형 몸 개그를 구사한 것이다. 이때부터 배삼룡은 ‘비실이’ 또는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리게 된다.

배삼룡의 팬이었다는 후배 개그맨 심현섭(40)은 “그분의 바보 연기는 모든 후배의 잠재 의식 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슬랩스틱 코미디는 그냥 단순한 자학 코미디가 아니가 정교한 계산이 뒷받침된 돼야 가능하다는 것. 그는 “자연스러움이 선생님의 가장 큰 무기”라며 “누구도 따라하기 어려운 코미디”였다고 말했다.


납치에 백지수표까지 ‘인기 절정’

1970년대 배삼룡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그의 바보 연기와 개다리 춤은 초등학생에서부터 성인까지 따라할 만큼 최고 인기였다. 이런 그의 인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3사 방송사 간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발생했다.

당시 MBC와 TBC, KBS가 그를 서로 섭외하려 대낮에 ‘배삼룡 납치극’까지 벌여 화제가 됐다. 심지어 TBC 측은 배삼룡에게 출연 제의와 함께 백지 수표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TV에서의 인기는 스크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70년대 중반〈형사 배삼룡〉을 비롯해〈출세작전〉〈의처소동〉〈운수대통〉등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악극단과 코미디 무대에서 익힌 연기력이 빛을 발하며 배우로서도 입지를 굳힌다.


사업 실패로 시작된 나락, 폐렴까지

그는 연예인에서 사업가로 변신한다. 78년 자신의 이름을 딴 ‘삼룡사와’를 설립했지만 사업미숙으로 실패한다.

이때부터 잘나가던 배삼룡의 인생에 변화가 찾아온다. 영원할 것 같던 그의 코미디언으로서 인기도 주춤한다. 설상가상 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저질 코미디’를 한다는 구실로 방송출연을 정지 당한다. 무대를 잃은 배삼룡은 미국행을 선택한다. 그곳 역시 그에게는 편안한 휴식처가 되지 못했다. 뉴욕, 캐나다, 토론토, LA 등지에서 그는 떠돌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83년 그는 3년 반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다.

화려한 제기를 노렸다. 하지만 실패한다. 그가 해외에서 머물던 사이 팬들의 기억 속에 ‘비실이’ 배삼룡은 사라졌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무대에 섰다. 자신의 아들 배동진, 임하룡, 이성미 등과 함께 영화〈철부지〉에 출연, 관록의 연기를 뽐내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 96년 갑작스러운 팔다리 마비 증세로 1년간 병상에 눕게 되는 힘든 시련에도 그는 불굴의 의지로 재활에 성공한다. 당시 70세를 훨씬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연기와 코미디를 향한 그의 열정은 전성기 시절 ‘비실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고인이 생사를 다툴 때에도 아들 동진 씨에게 “걱정하지 마라. 무대에 또 설 거다"고 말할 만큼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다.

재활을 마친 후 그는 다시〈눈물의 여왕〉〈그때 그 쑈를 아십니까〉등 악극은 물론 2003년 구봉서와 함께 〈웃으면 복이 와요〉공연을 이어가며 마지막 희극인의 끼를 남김없이 발산했다.

하지만 운명은 결코 그를 온전하게 놓아 주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흡인성 폐렴에 투병하던 그는 2007년 6월 한 행사장에서 쓰러져 입원했다.

그는 투병생활을 하던 동안에도 연기와 코미디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난 23일 오전 2시 11분 서울 풍납동 아산병원에서 향년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별이 되어 사라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유족들은 기념비를 세우고, 후배 코미디언들은 코미디박물관을 세워 고인의 추모코너를 마련할 예정이다.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준 별

“시청자들이 나를 얕봐야 한다. 얕보는 가운데서 편안하게 봐주는 것이 코미디다.”

배삼룡은 자신의 코미디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광대였다.

그의 웃음과 해학은 7~80년대 서민들에 위안이 됐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넘쳐난다. 한 시대에 웃음을 준 그는 코미디를 넘어 역사이고 문화였다는 평가다.

코미디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악극단, TV, 영화, 리사이틀, 밤무대 공연을 통해 웃음과 해학을 온 몸으로 전해주며 ‘비실이’ 또는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렸다.

한 젊은 네티즌은 “그를 알지 못한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 춰봤던 개다리 춤이 그분의 것이라니 마음이 묘하다”고 말했다.

또한 탤런트 최불암도 “배삼룡 선생님은 존경받아야 할 분이다. 그분이 있음으로 써 힘들었던 시절 웃을 수 있었다. 그분을 뵈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선생님은 위대한 코미디언”이라고 말했다. 한 문화 평론가는 “비틀스는 이미 베토벤과 모차르트와 동등한 입장이 될 것”이라면서 “세월이 흘러도 그들의 음악적 가치가 변치않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 찰리 채플린의 ‘걸음걸이’가 그렇듯 우리에게 배삼룡의 ‘개다리 춤’은 곧 역사이자 문화다. 그의 삶은 짧고 고됐지만, 그의 코미디는 영원할 것이다.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하늘에서도 사람들 웃겨줄 친구”

“시청자들이 나를 얕봐야 한다. 얕보는 가운데서 편안하게 봐주는 것이 코미디다.”

배삼룡은 자신의 코미디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광대였다.

그의 웃음과 해학은 7~80년대 서민들에 위안이 됐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넘쳐난다. 한 시대에 웃음을 준 그는 코미디를 넘어 역사이고 문화였다는 평가다.

코미디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악극단, TV, 영화, 리사이틀, 밤무대 공연을 통해 웃음과 해학을 온 몸으로 전해주며 ‘비실이’ 또는 ‘한국의 찰리 채플린’으로 불렸다.

한 젊은 네티즌은 “그를 알지 못한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 춰봤던 개다리 춤이 그분의 것이라니 마음이 묘하다”고 말했다.

또한 탤런트 최불암도 “배삼룡 선생님은 존경받아야 할 분이다. 그분이 있음으로 써 힘들었던 시절 웃을 수 있었다. 그분을 뵈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선생님은 위대한 코미디언”이라고 말했다. 한 문화 평론가는 “비틀스는 이미 베토벤과 모차르트와 동등한 입장이 될 것”이라면서 “세월이 흘러도 그들의 음악적 가치가 변치않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 찰리 채플린의 ‘걸음걸이’가 그렇듯 우리에게 배삼룡의 ‘개다리 춤’은 곧 역사이자 문화다. 그의 삶은 짧고 고됐지만, 그의 코미디는 영원할 것이다.

[김수정 기자] hohokim@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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