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이다. 이 단순하고 명료한 문장은 어쩌면 이란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란에서 내내 느꼈던 나의 감정들은 오로지 이란이잖아, 이란이니까 그리고 이란이기 때문이었다.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어설픈 은유도 불필요하며 현실적인 수사가 필요치 않은 곳. 표현을 허락한다면, 단 한 마디. 그 이름, 이란이다.
터키를 거쳐 이란의 시라즈 공항에 내렸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위도의 시라즈는 역시 겨울이라는 계절을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거의 모든 경험의 기억은 첫인상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시라즈의 명징하고 맑은 밤공기 그리고 공항 수속장에서 만났던 내 인생 첫 이란 사람. 그는 도장을 찍어주며 나에게 짧지만 순수한 눈인사를 건넸다. 새벽이었고 이곳이 이란의 입구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결코 쉬운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이란 땅에 들어왔고 그 차가운 땅에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이란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꿈꾸는 것처럼 잠이 드는 순간. 그 순간을 간직하고 싶다면, 그 꿈속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
시인과 장미의 도시, 시라즈

 
시-도시 라즈-비밀. 즉, 비밀의 도시. 이란에서 가장 추앙을 받는 시인인 하페즈가 잠들어 있는 곳이어서 시의 도시로 불리는 시라즈는 도시 곳곳에서 붉고, 반짝거리며 가녀린 향기가 났다. 이란을 처음 여행하면서 대도시가 아닌 시라즈로 들어온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다.
거울 모스크, 셔체러그

 
모스크에 도착하자 마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어떤 의식을 하고 있었다. 남성들은 오른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며 구호를 외쳤고 소년들은 작은 쇠줄이 달린 채로 자신의 몸을 때리며 행진했다. 마이크를 통해 절절하게 퍼지는 사회자의 외침과 둥둥거리며 울리는 북소리는 이 정교하고 빈틈없이 짜인 장방형의 공간에서 조직적으로 울려 퍼졌다. 모스크 전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났다.

공식 스태프의 안내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이방인은 무조건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며 전열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 14세기에 지어진, 시아파의 3대 성지 중 하나라는 이 모스크는 내부 장식이 타일 대신 온통 거울 조각으로 장식돼 ‘거울 모스크’라는 시적인 이름을 부여 받았다.

내부에서는 사람들이 코란을 암송하며 끊임없이 기도를 드렸고 그 장면들은 세밀한 거울 조각에 비쳐 다시 사방으로 화려한 만화경처럼 퍼져나갔다. 밤이 된 후 다시 모스크를 찾았다. 낮에 많은 시간 동안 모스크를 보았지만 아무래도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낮 시간의 북적임은 여전히 이어졌지만 낮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스크에 전등이 켜진 셔체러그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망연하게 서서 모스크를 바라보았다. 밤하늘의 별처럼, 한꺼번에 터져버린 폭죽처럼, 화려하게 피어난 밤의 셔체러그. 이제야 나는 시라즈라는 꿈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아차린다.
모스크에 핀 장미, 알리 에브네 함제 사원

 
여덟 번째 이맘-시아파의 최고 종교지도자이자 성인의 동생 알리 에브네 함제가 안치된 곳으로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곳을 기적을 일으키고 병이 치료되는 곳으로도 믿고 있다. ‘이맘의 후예’라는 뜻의 ‘이맘자데 사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특히 이곳 돔의 모습은 다른 모스크와 달리 조금 길쭉한 꽃봉오리 모양의 봉긋한 형태인 시라즈식 모스크로 알려져 있다.

시라즈의 ‘장미의 도시’라는 또 다른 별칭의 기원은 아마 이곳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마침 경내에서는 어떤 의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추도하는 장례식이라고 했다. 가족인 듯한 사람들이 마당에 카펫을 깔고 음식과 코란을 편 채 자리를 잡고 있었고 곧이어 짧지만 강렬한 아우라를 풍기며 지역의 종교 지도자로 보이는 사람이 등장했다. 모두들 그의 간결하고 익숙한 진행에 따라 행사를 치렀다.

기도와 의식이 끝나자 아이들은 쟁반에 과일과 오이 같은 채소, 스위트 등을 들고 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익숙지 않은 달콤함의 스위트였지만 나는 그것을 두 개나 목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모스크 안마당 바닥에는 페르시아어로 쓰인 석판이 깔려 있었는데 모두 묘지라고 했다. 모스크 내부의 모습은 셔체러그의 축소판 같았다. 수많은 거울 조각들이 촘촘하게 박힌 공간은 셔체러그보다 훨씬 눈이 부셨다. 사람들은 알리 에브네 함제의 묘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다. 나는 이 절절하고 뜨거운 공간에서 스스로 물러남을 택했다. 그것은 바로 이곳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info> 이맘이란?
이슬람 종교의 최고지도자를 의미하며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에서는 공통적으로 제4대 칼리프인 알리의 자손만을 이맘으로 인정, 고유의 신적 성격을 부여한다.
이란 시(詩)의 아버지, 하페즈의 묘

 
이란의 모든 집에는 두 가지 물건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하나는 코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란에서 코란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다고 하는 하페즈(1300~1389)의 시집이다.

이란 전역에 걸쳐 많은 사랑과 존경을 동시에 받고 있는 서정적 연애시의 대가인 시인 하페즈는 시라즈에서 태어났고 역시 이 곳에서 눈을 감았다. 단순히 시인의 묘라고 하기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의외로 무거워 보였다.

사람들은 보통 하페즈의 묘 끝에 손을 대고 무어라 말을 했는데 아마 그의 시 한 구절을 암송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표정은 경건했고 또 엄숙했으며 진지했다. 한 여인은 묘 주위에 앉아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울고 있었다.

아무도 그런 여인의 행동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고 언제든 같이 눈물을 흘릴 준비가 돼 있어 보였다. 시를 사랑하는 도시, 시라즈. 아니 이란.

시라즈에는 하페즈와 더불어 국민적인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싸아디의 묘도 있어 ‘시인의 도시’라는 칭호를 부여 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시인의 도시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시라즈 곳곳에서 풍기던 은은한 향기는 아마, 이곳에서 나왔을 것이다.

 
색이 빛을 만나 꽃이 될 때, 나시랄 몰크 모스크

 
1888년에 완공됐으며 ‘핑크 모스크’라고도 불리는 나시랄 몰크 모스크. 이란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모스크들이 푸른색을 띠고 있지만 이곳은 가장 최근에 만들어져 다소 근대 서양의 영향을 받았기에 푸른색이 물러나고 밝은 톤의 핑크색이 바탕을 이루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모스크로는 유일하다는 나시랄 몰크 모스크. 이곳은 아침에 가는 것이 좋다. 아니, 그래야 한다. 정오가 지나면 빛의 방향이 바뀌므로 이 신비로운 빛의 축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모스크로 들어선 후 바로 옆의 예배당으로 향하면 차마 안에서는 그것을 전부 담지 못하고 무언가 이상하게 얽히고 설킨 빛들이 밖으로 삐져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지 않은 내부는 이 엄청난 빛들을 담기가 확실히 버거워 보인다.

아침나절의 무구한 빛들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해 예배당 내부의 벽에, 양탄자에 그리고 천장과 기둥에 빈틈없이 스며들어 물들고는 이 공간을 믿을 수 없는 빛의 궁전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엄청난 빛의 파티에 비하면 믿기지 않지만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은 고작 네 가지로 제한되며 빨강은 순교, 파랑은 하늘, 초록은 이슬람 그리고 노랑은 태양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예배당의 구석진 곳에 조용히 앉아 빛의 쇼를 보는 것. 그것은 어쩌면 시라즈에 온 가장 회화적인 이유.
페르시아 제국의 뜰, 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 이란 여행을 꿈꿔왔던 사람 중에 이곳을 보지 않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페르세폴리스를 지나친다는 것은 인도에서 타지마할을, 캄보디아에서는 앙코르와트를 그리고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 돌아서는 것과 같다고 단언한다.

시라즈 북동쪽 약 70㎞ 지점, 마른 사막을 달리다 갑자기 척박한 라흐마트 산맥 앞으로 평원이 이어지고 페르세폴리스는 그곳에 홀연히 나타난다. 수세기 동안 흙먼지와 바람 속에 묻혀 있었지만 1930년 대대적인 발굴로 드디어 빛을 보게 된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1세 때인 기원전 518년부터 짓기 시작해 백년에 걸쳐 만들어진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BC 550~330) 왕조의 수도로 ‘페르시아인들의 도시’를 뜻하고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길이 450m, 폭 300m의 부지 위에 ‘만국의 문’과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이의 돌기둥을 세워 만든 ‘아파다나 왕궁’ 그리고 궁으로 향하는 계단 벽면에 새겨진 속국으로부터 사신들이 조공을 들고 오는 사실감 넘치는 ‘외벽 부조’와 산 절벽에 깎아서 만들어 놓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 3세의 무덤’ 등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부조는 아마 지금의 만국 박람회의 시초가 아닐까하는 단서를 제공하기에 충분한데 현실감 넘치는 묘사와 이야기, 넘치는 생동감은 25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극사실적이며 보존 상태도 훌륭하다.

양들을 바치는 이들은 시리아에서 향료를 들고 오는 사람들은 인도에서, 페니키아인은 와인을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를 들고 오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아파다나 왕궁 터에는 총 72개 기둥의 흔적이 있다. 웅장하고 매끈한 기둥 72개가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모습.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이 무참하게 짓밟지 않았다면 그리스의 파르테논이나 현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마저 이곳에서 머리를 숙여야 했을 것이다. 페르세폴리스에 들어온 이상, 모든 것들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면 어디선가에서 사자의 포효가 들렸고 또 눈을 뜨면 세계에서 온 다양한 인종들이 각각의 고유의상을 입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물건을 흥정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때론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갔다. 바위산에서 돌 하나가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에 정신이 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아직까지 페르세폴리스에 있었을 것이다.
 
<tip>
영화 ‘300’이 바로 다리우스의 아들이었던 황제 크세르크세스와 스파르타 결사대와의 전쟁을 그린 영화이다.

 
바위에 새긴 거대한 신비, 낙쉐 로스탐

 
페르세폴리스에서 서북쪽으로 6km쯤 떨어진 곳, 낙쉐 로스탐이 있다. 이 거대한 암굴 무덤은 다리우스 2세와 다리우스 1세 그리고 크세르크세스 1세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등 아케메네스 왕조 4명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바위산 절벽에 십자가 형상을 새겨 넣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묘인 낙쉐 로스탐을 처음 보았을 때는 솔직히 페르세폴리스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형태와 크기였기 때문이다. 이 공간이 페르세폴리스 건설을 지시했다는 다리우스 1세의 무덤이며 불을 숭배하고 시신을 새에게 바친다는, 조장 풍습으로 유명한 조로아스터교와 맞물린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는 드디어 꿈과 현실의 절대적인 경계, 딱 그 중간 지점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높이가 20여 미터가 되는 무덤 아래에는 페르시아 제국 멸망 후 페르시아의 적통임을 자처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조각들이 마치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새겨져 있다.

이 왕들의 무덤 정원 앞에는 기원전 5세기에 만들어진, 아직 학설이 분분하지만 조로아스터교의 신전이라고도 조심스럽게 추측되는 카바 신전이 있어 이 꿈같은 공간에 정점을 찍는다. 사람들은 모두 선 채로 손에 턱을 괴거나 억지로 팔을 뒤로 돌려 잡는 등 약간은 비일상적인 이상한 자세로 이 기념비적인 구조물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오히려 무척 무감한 표정과 자세였다. 난생처음 보는 당황스러운 장면 앞에서 쭈뼛거리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모습. 사람들은 모두 그 시절로 되돌아가버렸다.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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