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리고 찌르고 염산 테러까지

<뉴시스>
연인 간 폭력 ‘가해자’ 매년 7700여명
협박·스토킹·감금·성폭행·살인 부지기수
英, 전과조회 ‘클레어법’ 美 ‘의무 체포’
전문가들, 피해자 보호 법적 장치 절실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이별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사랑하던 사람이 이별을 통보하면 ‘칼’까지 드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2015년 여성 인권 단체가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한 살인사건만 60건에 달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전이별’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연인 간 폭력 피해자를 위한 보호 장치에 적극적인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아직 법적·제도적 장치가 미비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피해자를 위한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 연인 간 폭력은 더 이상 개인사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엄연한 범죄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1. 지난해 4월 A(31·여)씨는 1년 정도 교제한 남자친구 한모(31)씨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집착이 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잔인한 비극의 결말이 될 줄은 몰랐다. 한 씨는 A씨를 계속 찾아와 새로 시작할 것을 청했고, 안 만나주면 뛰어내리겠다고 협박도 했다. 하지만 A씨는 끝내 거절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한 씨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달라고 했다. 한 씨는 이 만남에서 미리 흉기를 소지해 간 뒤 A씨를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벌건 대낮에 서울 도심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2. 지난해 5월 30대 직장인 여성 B씨는 집 앞에서 ‘염산 테러’를 당했다. 전 남자친구 양모(41)씨가 벌인 일이었다. 양 씨는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B씨 집 앞에서 미리 준비한 염산을 B씨에게 뿌리고 달아났다. 이별 통보가 그 이유였다. B씨는 양 씨의 의심증이 심해지자 교제 4개월 만에 이별을 고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양 씨는 염산을 뿌렸다. B씨는 이 사고로 눈을 크게 다쳤으며 어깨에 화상을 입었다. 양 씨는 B씨를 납치할 요량으로 전기충격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3. 지난달 9일 30대 여성 C씨가 자신의 집 서울 논현동 빌라의 주차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 발견됐다. C씨는 두개골이 완전히 골절될 정도로 심한 폭행을 당한 흔적이 곳곳에 발견됐다. C씨는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흘 만에 숨졌다. 가해자는 전 남자친구 강모(33)씨였다. 강 씨는 C씨가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을 가해 숨지게 했다.
 
사랑하던 사람이 이별을 통보하자 돌변해 폭력과 살인까지 저지르는 ‘이별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여성 인권 단체 ㈔한국여성의전화가 관련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 2009년에는 애인이나 남편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70명, 살인미수에 그친 경우는 7명이었지만, 2015년에는 각각 91명, 95명으로 급증했다. 연인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70명에서 91명으로 40% 정도 증가한 것이다.

2015년에 살해된 여성 중 41%(37명)는 이별로 인한 비극이었다. 같은 해에 이별 살인으로 여성과 여성의 가족 등 60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6일에 1명 꼴로 이별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단체가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만을 분석한 결과가 이 정도다.
 
지난해에만 9000여건 단속
‘안전이별’ 신조어까지


경찰은 지난해 2월부터 전국 경찰서에 ‘데이트 폭력 근절 특별팀’을 운영해 집중 단속을 벌였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데이트 폭력 집중 단속 결과 9364건의 신고가 접수됐으며 이 중 8367명이 형사 입건됐다. 2월 한 달에만 2015년 같은 기간 대비 형사 입건 피의자가 49.1%나 증가했다.

데이트 폭력 검거 인원은 2012년 7584명, 2013년 7237명, 2014년 6675명, 2015년 7692명으로 매년 평균 7700여명, 하루 평균 21명이 연인에게 각종 폭행을 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5년간 애인을 살해하거나 살인 미수로 검거된 가해자는 467명에 달했다.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못하는 등의 경우까지 포함하면 실제 피해자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이별 통보가 위험한 보복으로 나타나는 사건이 잦아지고 있다. 단순한 말다툼을 넘어 협박, 스토킹, 감금, 성폭행, 살인 등 강력 범죄로 이어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안전이별’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실정이다. 스토킹 당하지 않고, 감금 당하지 않고, 얻어맞지 않고, 사진이나 동영상 유출 협박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의 안위와 자존감을 보전하면서 안전하게 이별하자는 뜻이다. 온라인에는 ‘안전하게 이별하는 방법’이라는 글이 퍼질 정도로 이별 범죄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는 추세다.

우리나라는 ‘이별 범죄’를 다스릴 수 있는 법적 보호장치가 미비한 상태다. 보통 단순 폭행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이마저도 물리적 폭력이 있을 때만 가능할 뿐 협박이나 언어, 정신적 폭력은 입증도 쉽지 않아 처벌이 어렵다.

상대방의 명확한 거부 의사가 있는데도 면회나 교제 등을 요구하며 따라다니는 행위를 하면 스토커로 간주해 처벌하는 정도다. 이마저도 경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범칙금 10만 원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같은 행위는 보통 연인 사이의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어 제3자가 개입하기도 난감하다.

반면 선진국은 연인 간 폭력 피해자를 위한 보호장치를 적극 마련하는 등 우리나라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영국은 지난해 3월 데이트 상대의 전과를 조회할 수 있는 ‘클레어법’을 시행하고 있다.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피해자 이름을 따 만들었다. 미국의 경우 1994년부터 여성폭력방지법에 데이트 폭력을 포함해 가해자를 ‘의무 체포’한 뒤 피해자와 격리하는 조치 등을 취하고 있다.
 
‘이별 범죄형’ 대비
물적 증거 확보해야

 
전문가들은 우선 사귀는 과정에서 ‘이별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의 주요 유형이 있으므로 이를 숙지해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소 등은 ▲상대방을 자신의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고 타협을 모르는 사람 ▲자존감이 낮아서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못 참는 사람 ▲내 차, 내 집, 내 가족 등 특별한 것에 대한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 ▲충동적이고 자제력이 약한 사람 ▲‘내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며 집착이 과도한 사람 등을 가정폭력과 데이트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사람으로 꼽았다.

경찰 관계자는 특히 폭력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이 관계자는 “때리는 습관은 못 고치기 때문에 폭력을 습관적으로 행사하는 애인과는 결별하는 게 상책”이라며 “남자친구의 폭력 성향까지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건 극복해야 할 환상”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연인 간 폭력을 단순한 사랑싸움으로 여기면 안 되고, 엄연한 범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최희진 성폭력 상담소장은 한 매체에서 “남성 가해자들 대부분이 여자친구를 소유물이라고 여겨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고, 여자는 무조건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남성 우월주의가 강하다”며 “피해 여성들도 남성의 가학 행위가 반복되면 사랑이 아닌 범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데이트 폭력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로 가볍게 치부해 해결 시기를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더는 가벼운 사랑싸움이 아닌 사회적 개입이 필요한 범죄라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가해자에 대한 처벌과 함께 피해자 보호를 위한 법적 근거를 강화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외국에서는 이미 2000년 초반에 스토킹 법안이 만들어졌으나 국내는 논의만 되고 있고 답보 상태”라며 “강력 범죄를 사전에 막기 위한 스토킹 관련 법안을 마련해 수사 기관에서 명확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경찰 관계자는 “막연한 스토킹 신고에는 경찰이 개인사로 보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폭력이나 협박이 있을 경우 사진으로 찍거나 녹음, 녹화해 물적 증거를 남겨야 조기에 공권력 개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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