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문율 90%에 육박하는 제주. ‘세계 7대 자연경관’이라는 수식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특유의 멋진 경관과 감귤 맛은 여전하다. 하지만 다시 찾는 이들은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거나, 원하고 있다. 그 중 하나의 테마로 떠나는 ‘아트 투어’. 그렇게 다시 찾아 둘러보니, ‘예술특별자치도’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아티스트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제작된 ‘아트 쏘카’를 타고 떠나 본 제주에서의 2박 3일.

첫째 날 아라리오 로드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세계 50대 컬렉터에 드는 김창일 회장은 서울에 만족하지 않고 제주에 눈을 돌린 지 3년이 되었다. 제주 구시가지에 버려진 탑동 시네마, 바이크숍, 그리고 동문 모텔 두 개의 동을 개축해 전시장으로 활용해 ‘아라리오 로드’가 됐다. 앞으로 다섯 곳을 더 열어 문화복합단지로 만든다는 계획도 있다.

공항 주변 쏘카 스테이션에서 차를 타고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아라리오 로드의 ‘새빨간’ 빌딩 네 동을 드나들며 3700여 점의 방대한 컬렉션에서 다시 선별한 상설전과 기획전, 지역 작가들의 그룹전 등을 감상하다 보면, 제주를‘아트 투어’로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럽다.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의 개관전이자 상설전 성격을 띠고 있는 'BY DESTINY'는 소장품 중 백남준, 키스 해링, 빌 비올라 등 43명의 작가로부터 수집한 127점의 대표적 소장품들을 2014년 10월 1일부터 탑동 시네마동과 동문 모텔 I동에 분산 전시하고 있다.

특히 동문 모텔 I의 한 층은 완전히 헐어내지 않고 벽과 문이 있었던 자리 일부를 오브제로 재창조한 아오노 후미아키의 작품 그 자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를 끈다. 탑동 시네마동 역시 작품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동선과 배치에 신경을 쓴 모습이 역력한데, 20미터의 배를 표현한 수보드 굽타의 초대형 작품 ‘배가 싣고 있는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를 설치하기 위해 3층 바닥을 헐어 2층과 한 공간으로 통합한 것도 인상적이다.

그 밖에도 요절한 천재 조각가 류인을 추모하는 ‘존재의 연소’, 이동욱 개인전 ‘LOW TIDE’, 제주 출신 젊은 작가 4인전 ‘제주 정글’까지 꼼꼼히 둘러본다. 아라리오 로드를 식사에 비유하자면 잘 차려진 코스 요리 같다. 다양하면서도 한 사람의 ‘촉’으로 컬렉팅해온 맥락이 공간의 재구성과 큐레이팅에도 잘 반영되 어서일까. 미묘한 일관성에 있어 뷔페 같은 아트 페어나 비엔날레보다 만족도가 높다.
둘째 날 제주 컨템포러리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현대미술관과 제주도립미술관을 잇달아 개관하며 ‘아트 제주’시대를 열었다. 제주도립미술관에는 제주해녀문화를 널리 알린 장리석 화백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반영사진을 찍기 좋은 촬영 명소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다소 쓸쓸하고 프로그램이 빈약하다.

반면 제주현대미술관은 외관에서는 살짝 밀리지만, 예술인들이 제주에 큰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된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갤러리 노리’로 시작되는 초입부터 ‘김창열 도립미술관’, ‘스페이스 예나르’ 등 주변 전시공간과 현대미술관의 분관까지 반나절 코스로 둘러볼 수 있다.

‘물방울 작가’라는 수식어로 유명한 김창열 화백은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국내·외 미술계에서도 미학적 논의와 관심을 불러 일으켜 한국 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백남준, 이우환 등과 더불어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 컬렉션돼 있으며, 더욱이 그가 활동했던 프랑스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한 미술관의 개관전시 ‘존재의 흔적들’은 김 화백의 60~70년대의 초기 작품, 80~90년대의 중기 작품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후기 작품들로 구성해 그의 작품세계를 핵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형 작품들을 포함한 서른 점을 감상하고 옥상에 오르면 분수가 나오는 중정의 빛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주차공간도 넉넉하다.

이곳에서 갤러리 노리로 가는 지름길이 있어 차를 움직일 필요 없이 걸어서 다녀올 수 있다. 올해로 제주 정착 7년 차인 노리 김명복 화백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은 대관 없이 초대전을 고집함으로써 기획의 주체성과 흥미로운 큐레이션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제주현대미술관 본관 상설전시실에서 김흥수 특별전시를 둘러보고 나와 야외 아트숍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어린이 조각공원을 거닐다 보면, 백구 두 마리가 뛰어와 어딘가로 가자고 하는 듯하다.

이들은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스페이스 예나르에서 온 귀염둥이들이다. KBS TV쇼 ‘진품명품’에서 민속품 감정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고미술 전문가 양의숙 대표는 삼청동에 있는 본관 외에도 지난 10월 고향 제주에 동명의 전시공간을 오픈했다. 넓은 마당과 세련된 자줏빛 철문, 적당한 크기의 화이트 큐브가 매력적인 예나르는 제주공예 전시를 시작으로 하였지만, 꼭 고미술이나 제주 테마에 묶이지는 않는다.

현재 서울옥션의 ‘프린트 베이커리’와 공동 기획해 김환기, 박서보 그리고 앞서 둘러본 김창열까지 국내 유명 원로 작가들의 판화를 ‘빵 고르듯’ 구매할 수 있는 트렌디한 상업 전시 ‘프린트 베이커리 더 에디션’. 이곳이 앞으로 또 어떤 재밌고 실용적인 전시로 아트 투어리스트 들의 이목을 끌지 궁금해진다.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은 한국화가, 서양화가, 사진가, 수필가, 서예가, 석공예가, 분재예술가, 의류 디자이너, 방송인 등 매우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입주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롭다.

중국작가 펑정지에도 작업실이 있어 제주의 국제화에 아티스트들의 참여가 더욱 많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독채 공간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덧 제주현대미술관의 분관에 다다르는데, 현재는 바로 앞에 작업실이 있기도 한 박광진 화백이 기증한 149점 중 선별한 ‘바람, 억새소리’ 전시가 진행 중이다. 산록도로를 따라 가며 보는 제주의 풍광이 그대로 미술관 안에 채워진 느낌이다.
셋째 날, 예술가들과 제주도
 
어느덧 제주 아트 투어의 마지막 날이다. 서귀포 쪽으로 이동해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왈종 미술관, 이중섭 미술관 등을 들르기로 한다. 두모악은 1985년부터 제주에 정착해 사진을 찍다가 루게릭으로 세상을 떠난 김영갑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이다.

그는 폐교된 ‘삼달 국민학교’를 사진 전시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병세가 깊어져 정작 2002년 개관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결국 2005년, 한 줌의 재가 돼 두모악 마당에 뿌려졌다. 화산재를 뿌려놓은 듯한 현무암과, 낮은 실내 조도는 다른 화이트큐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공간을 찾은 이들은 마치 납골당의 추모관을 찾은 것처럼 다소 엄숙한 느낌으로 그의 사진과, 작가가 거닐던 유채꽃밭과 마주한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들이 절대 우울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갤러리 역시 뒤편에 자리한 셀프 카페로 방문객들의 추억을 보듬는다. 두모악에서 다시 20분을 달리면 도착하는 포토갤러리 자연사랑 미술관도 역시 폐교한 초등학교를 활용한 전시공간이다.

사진기자 출신의 작가 서재철 관장은 그야말로 ‘화산섬 제주의 자연’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써 이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또 서귀포항과 정방폭포 부근에는 왈종 미술관이 있다. 이곳은 제주 아트 투어 코스 중 가장 풍경이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바다를 보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그리스에 가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마치 산토리니의 한 건물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다비드 머큘로와 한만원이라는 스위스와 한국 건축가의 합작이라는 점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백자를 형상화하면서도 본래 작가가 살던 서울 삼청동 집의 외관과 거의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해 매우 까다롭게 지어졌다고 한다. 내부는 이왈종 화백이 걸어온 예술 인생을 총망라하고 있으며, 평면 작품들뿐만 아니라 조각, 도예, 미디어, 그리고 미성년자 출입구역까지 최적의 동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카페와 아트숍이 있는 별관까지 처음부터 내방객들을 배려한 설계로 지어졌음을 잘 알 수 있다. 아이디어와 실용성이 돋보이는 아트 상품들의 자체 생산 비중을 계속 높여온 왈종 미술관, 개관 이래 3년간 방문자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왈종 미술관에서 5분거리 오름 중턱에는 바다가 좀 더 멀긴 하지만 대신에 더 넓게 볼 수 있는 ‘봄 미술관’도 있다.

이곳은 고급 펜션과 카페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펜션 아래에 위치한 전시실에는 현재 김호득 작가와 박충흠 작가의 작품이 환상적인 아우라를 뽐내고 있다. 암실 속에 빛나고 있는 한지 소재 작품과 조형의 향연은 4차원적 공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이중섭 미술관은 제주도가 아트 투어 코스로 변모할 수 있게 한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이중섭 생가뿐만 아니라 이중섭 거리도 조성돼 있다.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포토존 하나만 갖춰놓은 채 조금은 딱딱한 본관의 관람 환경은 다소 개선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렇게 전시 공간을 중심으로 2박 3일간 제주도를 돌아보면, 이 섬은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 아티스트들 사이에서도 제주에서 작업하거나 전시하고픈 의지가 날로 높아지고 있는 건 당연하다.

마침 올해 오픈을 앞두고 있는 호텔 플레이스는 지난 8개월간 ‘ART-236’이라는 아트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공모에서 선정된 작품들로 꾸며지고 있는 현장은 아직 정리가 덜 된 상황이었기에 카메라에 담지는 않았지만 미술관의 개관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해도 될 만큼 화려했다. 그 밖에도 기당 미술관 등 미처 소개하지 못한 공간들이 있다는 점이 아쉽다. 제주에 다시 갈 계획을 세운다면 꼭 한 번 아트 투어 테마를 가미해보길 추천한다.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