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 있는 그대, 보고 싶었다. 항상 잊지 못하고 끊임없이 되뇌던 당신의 이름, 발칸.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에서 보냈던 꿈같고 때론 여운 깊은 영화와 같았던 기억들. 이제 잡지 못하고 놓지도 못한 채 그 속에서 흘러간 집시의 시간을 추억할 때. 잊힌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는 방법, 발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 이 심정적, 지리적으로 먼 낯선 이름의 나라들은 줄곧 유고슬라비아로 기억되고 있었다. 현재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그리고 마케도니아는 이들과 함께 과거의 유고 연방에 포함되어 있는 나라들이었다.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소련의 붕괴로 각자의 이름을 되찾은 이들은 발칸이라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지역으로 묶였고 각자의 나라로 다시 자리를 찾았다. 보스니아의 순박함과 유연함, 몬테네그로의 경건함과 간결함 그리고 세르비아의 자존감과 화려함. 이들의 문화와 기질 그리고 역사와 환경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서로 분명히 다르고 또 그렇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슬픔과 아픔이 정확히 교차했고 동시에 공존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간 그들. 그들이 보여주었던 것 그리고 그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 그것은 바로 우리는 발칸의 사람들이고 지금은 발칸의 시간이라는 것.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발칸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그리고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전하지 못한 애환이 녹아있는 곳, 보스니아. 발칸에서 보스니아를 가장 먼저 들러야 하는 것은 이곳이 가장 발칸스러우며 또 집시적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스타리그라드, 사라예보

 
사라예보의 거리를 걷고 있으면 마치 지난 역사의 한 컷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이곳이 바로 세계 1차 대전이 발발된 극적인 현장이기 때문이다. 탕! 평화로운 일요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에게 거칠게 울린 한 발의 총성은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먼 일본까지 참전하게 되는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 최악의 오명 중 하나로 기록된다.

사라예보 중심을 흐르는 밀야츠카 강에 있는 라틴 다리는 전쟁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 벌어진 다리로 지금은 무심히 그저 강 위에서 그 역사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강을 건너기 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하고 세르비아인이 숨어 들어갔다던 건물이 있다. 건물은 당시 카페였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돼 운영 중이다.

벽에 당시의 상황을 기록해 놓은 석판이 있다. 구 시가지를 걷다 보면 전쟁이라는 딱딱한 단어는 이미 퇴색한 듯하다. 사람들은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지나간 과거의 일들 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행복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유추다. 한국을 떠나기 전 발칸이 줬던 다소 우려 섞인 시선들 그리고 긴장 섞인 설렘들. 하지만 의외로 사라예보에서 그런 우중충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건물 곳곳에 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가 호의적이었고 이곳을 감싸는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그것은 보스니아가, 혹은 사라예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일종의 마음이자 건네는 손짓이었다.
가지 후스레프 베그 모스크

사라예보 구시가지 내엔 바슈카르지아 광장이 있다. 이 광장 주변으로 모스크와 가톨릭 성당 그리고 세르비아 정교회 등 조금은 이질적인 종교 시설이 모두 함께 위치하고 있다. 보스니아는 유럽 대륙 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슬람교가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종교로 예전부터 개개인의 종교적인 신념과 색채가 강한 나라였다.
가톨릭 대성당

발칸에서 특히 보스니아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많이 누그러진 일이지만 예전에 보스니아는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우리와 그들이라는 프레임으로 구분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자에 대한 시선은 그렇게 정확히 둘로 나뉘지 않은 것 같았다.
세르비아 정교회

여행자는 바로 그들이었고 내가 바로 보스니안이었으며 결국 우리는 모두 같았다. 다소 무뚝뚝한 성격의 보스니안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환영의 인사였다. 차분하게 깔린 돌바닥을 따라 구시가지 입구까지 가면 작은 탑이 하나 나온다.

마치 티베트의 어디쯤에라도 와 있는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의 이것은 1891년도에 건축된 이슬람식 무어풍으로 만들어진 공공수도 세빌리 샘. 120년간 한 번도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 이 샘의 물을 마시면 다시 사라예보로 돌아온다는 속설을 지닌 보스니안들의 성수. 언젠가는 자신이 살던 바로 그 땅으로 반드시 돌아간다는 것. 가장 당연하고 그리운 고백, 사라예보는 애틋하다.

 
사라예보의 장미, 희망의 터널

 
잘게 쪼개지고 벌어진 발칸의 역사에서 보스니아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한다.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 간의 민족, 종교 그리고 인종적 분쟁. 이들에게 유럽의 화약고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이 건네진 보스니아 내전 시절. 사라예보에서 외곽으로 차를 몰아 20여 분, 벌판을 지나 한 동의 평범한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모든 보스니안들이 절대로 잊지 않을 장소인 ‘희망의 터널’.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고립되었던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물자 수송을 했던 비밀의 생명 터널. 건물은 단순하게 가옥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철저하게 집으로 위장된 시설물로 보이기 위함이다.

외벽에는 당시의 총탄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주고 붉은색으로 칠해진 앞마당의 자국은 당시에 포탄이 직접 떨어진 장소를 붉게 채색해 피폭의 이미지를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한다. 보스니안들은 이 흔적을 ‘사라예보의 장미’로 명명해 기억하고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 갱도처럼 터널이 이어지고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는 당시의 상황을 급박하게 촬영한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이 생존만이 절대적인 목표가 되었던 공간을 희망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추억하는 사라예보 사람들.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모든 보스니안들의 어머니 강,
브렐로 보스네 공원


 
지도를 보면 파란 물줄기가 희미하게 시작돼 전 보스니아에 퍼져 나가는 지점이 있다. 바로 보스니아 땅의 젖줄인 보스니아 강의 수원지.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많은 지하수가 나오는 곳으로 알려진 이곳에만 아홉 개의 지하 수원이 있고 이곳에서 끊임없이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와 보스니아 땅 전체를 적신다.

보스니아의 모든 물은 이곳에서 시작되고 나누어지며 먼 길을 떠난다. 보스니아라는 나라 이름도 바로 이곳에서 흘러내린 물이 강을 이룬 보스니아 강에서 유래된 것이고 브랠로 또한 보스니아어로 원천이라는 뜻이니 이곳은 모든 보스니안들의 노스탤지어일 것이다.

한적한 공원으로도 꾸민 곳이지만 마치 폭포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압도적인 울림이 있는 곳. 지하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로 실제로 바로 음용도 가능하다. 맑은 물의 증거는 호수에 유유히 떠다니는 백조들과 강바닥의 송어 떼. 마침 비가 온 후 안개가 자욱하게 공간을 휘감고 이어 햇빛이 나지막하게 나무들 사이로 퍼지면 이곳에서 의외로 보스니아 최고의 시간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코니츠
사라예보에서 남서쪽으로 약 50km 정도 떨어진 코니츠는 보스니아 최고의 관광지인 모스타르로 향하는 중간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한 가운데로 네레트바 강이 지나고 다리 건너편에 역시 대형 모스크와 가톨릭 성당의 첨탑이 어우러져 있어 평온함이 가득하다. 강변의 카페에 앉아 특유의 무거운 터키식 커피를 마시며 그저 강을 바라보는 것. 바로 코니츠에서 할 일.
지하 세계, 티토의 벙커


지하벙커는 코니츠 마을에서 강을 따라 산길로 20여분 가면 나온다. 한 나라의 역사를 단순히 그곳을 찾은 여행자가 평가하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 티토가 없었다면 발칸 전체가 독일의 점령 하에 놓였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듯하다.

정부 방위군을 통해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고 입구부터 경계가 삼엄해 마치 비밀스러운 현장에 들어서는 것 같은 이 시설은 특이하게 내부가 아닌 외부의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돼 있다.

희망의 터널과 마찬가지로 산속에 있는 흔한 가정집처럼 생긴 벙커는 1950년에 핵 공격에 대비한 티토의 지시로 설계된 것으로 발칸 지역 곳곳에 지하 벙커가 열 곳 이상이 있다고 한다. 270m 깊이에 26년 동안 만들어진 이 벙커는 용도가 다른 수많은 시설과 갖가지 관계 장비들로 가득 차 있으며 6개월 동안 외부의 지원 없이도 독자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전시물에 쓰인 집시라는 글자가 그렇게 가슴에 와 닿았던 티토의 벙커. 그 치밀함과 철저한 준비성. 티토가 이룩해 놓은 또 하나의 지하 왕국.
성모의 발현, 메주고리예

 
슬라브어로 ‘산과 산 사이의 지역’이라는 뜻인 메주고리예. 몇십 년 전만 해도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던 한적한 시골 마을인 메주고리예는 1981년 6월 24일, 이곳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이후 전 세계적인 가톨릭 성소로 알려져 오고 있다.

마을에 사는 10대 소년 6명이 뒷산 언덕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직접 만난 것. 소년들의 성모 발현 주장을 놓고 가톨릭교회와 과학계 등의 의견이 분분한 탓에 아직까지는 성모 발현지로 공식화되지는 못했지만 일반 가톨릭 신자들은 인정하는 경향이 강해 매일 전 세계 각지에서 온 가톨릭 신도들의 영성 어린 방문을 받고 있다.

뒤뜰에 있는 ‘치유의 예수상’에는 많은 신도들이 예수상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슬로베니아 국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졌다는 예수상의 오른쪽 다리 무릎에서 미세하게나마 성수가 나온다고 알려져 있어 그 기적을 체험하려는 신도들의 방문이 미사가 없는 날에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조용한 마을에서 벌어진 기적, 수천 명이 보여주는 현장의 엄숙함 그리고 메주고리예에서 체험하는 종교적 기적. 그것이 바로 보스니아의 유연성.

 
모스타르

 
보스니아의 정식 국호는 ‘보스니아 앤드 헤르체고비나(Bosnia and Herzegovina)’. 나라 이름에 and가 들어가는 것은 다소 생소한데 이는 원래 북부의 보스니아 지역과 남부의 헤르체고비나 지역이 합쳐진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되지 않았다면 분명 남쪽을 대표하는 수도가 되었을 곳 그리고 보스니아로 여행을 온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 모스타르.

모스타르는 ‘다리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도시를 흐르는 네레트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스타리 모스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곳이다.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절인 16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이 아름다운 아치형 다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라 불리는 1993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포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졌지만 지금은 재건돼 현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다리 입구에 놓인 돌에는 ‘Don’t forget 93’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데 그 뜻은 미루지 않고도 짐작이 가능하다.

1088개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이슬람 건축이 유럽에 남긴 교각들 중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스타리 모스트는 완공되었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 구간 다리였다고도 한다. 다리 위에 서면 네레트나 강에 모스타르 전경이 펼쳐지지만 이 다리를 경계로 내전 당시 모스크가 보이는 오른 편의 이 슬람계와 반대편의 가톨릭계 사람들이 서로 극렬하게 반목했다고도 한다.

이 다리는 그러나 지금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묶어주고 또 과거 서로 반대편에 섰던 모든 모스타르 사람들 양쪽의 손을 맞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중간의 지점에 놓여있는 다리는 그래서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그 거대한 화해의 은유. 보이지 않는 용서가 가득한 곳, 모스타르 그리고 그 다리, 스타리 모스트.

자, 이제는 아픔은 뒤로하고 현재 모스타르의 아름다움과 마주할 시간. 어쩌면 이것이 진짜 모스타르가 지니고 있던 원래의 모습일는지도 모르겠다.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조금은 울퉁불퉁한 바닥의 자갈길이 이어지지만 꾸미지 않은 순수함은 더욱 모스타르에 빠지게 되는 작은 단서들. 겨울이라 비수기인 까닭에 호객 행위도 심하지 않다. 

다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강변으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한 사내가 다이빙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곧바로 강 아래로 뛰어내린다. 오랫동안 모스타르 남자들이 사랑하는 여자한테 구애할 때 했다던 전통적인 다이빙.

그러나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일정한 액수를 받고 차디찬 강으로 뛰어내리는 관광 상품으로 바뀌었다. 서로 간에 겨눴던 질시와 미움을, 이제는 전쟁보다 지독한 현실로 승화시킨 모스타르 사람들. 그래서인지 더욱 애잔함과 서글픔이 맞물리는 곳. 모스타르, 슬프되 아름답기를.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