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동독의 사회주의가 붕괴했고 볼셰비키혁명 이후 시작된 좌파 이데올로기는 소련연방의 해체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중국 역시 시장경제를 수용하는 등 좌우파 이데올로기 대결은 자유 이데올로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트럼프가 온갖 악재를 무릅쓰고 ‘미국 우선주의’를 모토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 된 데서 보듯이 세계 각국은 지금 국가정책의 기조를 국익우선으로 맞추고 있다.
이 같은 정책기조는 19세기 말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실용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국가 구성원 개인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한 실용주의 사상이 이념논리를 깨뜨린 것이다.
우리가 지난 10년 간 치룬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킨 것은 그전 10년간 좌파 정부의 이념 지향적 정책을 반대한 것이다. 국론이 분열되고 경제성장의 기회마저 소진되자 국민들은 이념보다 실용주의를 택한 것이다. 이렇게 집권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에 일방적인 퍼주기 정책을 지양하고 핵 폐기와 개방을 유도하는 상호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또 그동안 악화된 한미관계를 복원했다. 
그런데 다시 우리나라를 10년 그 전으로 돌려놓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편승한 이념 세력들이 총궐기하고 나섰다. 이들은 한반도 사드 배치를 반대하면서 한·미 관계를 경색시키려 하고 있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며 ‘가짜보수를 불태워 버리겠다’고 했다. 또다시 온 나라를 이념 싸움의 프레임 안에 가둬놓겠다는 것이다. 
이들 세력은 마치 자신들이 벌써 집권이라도 한 듯 사전 조각(組閣) 명단까지 나돌고 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가 계속되자 정권교체를 기정사실화한 분위기다. 최순실 사태로 실망한 ‘샤이 보수’가 아직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태극기민심’이 어떠한 ‘태풍’을 만들어 낼지에 대한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인다.
선거에서는 자신의 지지층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건 상대 진영이 뜨겁게 결속하는 빌미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지난해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패배한 것은 공천 과정에 보여준 여당 모습에 실망한 보수 유권자들이 선거를 포기하고 돌아앉은 이유였다. 반면 승기(勝機)를 느낀 진보세력의 결집 양상이 두드러졌다.
오는 대선 역시 새 전기(轉機)를 마련치 못하면 최순실 사태에 실망한 보수 유권자들이 선거를 외면할 공산이 크다. 문제는 뚜렷한 보수진영 주자가 없다는 점이다. 이념 세력들이 기고만장할 만한 환경이다. 빠른 시일에 새로운 다크호스가 나타나 기죽은 보수 세력을 다시 결집시키지 않는 한 현재로선 보수 재집권의 여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보수 유권자들이 과거 좌파 정권 때의 일을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먼 이념지향적 정책으로 국론이 분열돼 국력이 내려앉았던 기억이 사라질 리 없다. 박근혜 정부에 실망했다고 해서 보수 세력이 이념정권의 재탄생을 바라지는 않는다. 단지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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