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까지 드러내고 다시 채우려는 기인의 자화상


육두문자 섞인 독설과 실명 공개로 한국영화계 풍토를 비판한 김기덕 감독의 ‘아리랑’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주목할 만한 시선’의 수상작으로 까지 점쳐지는 ‘아리랑’은 김 감독의 1인극 영화다. 배우, 스태프 없이 제작돼 홀로 다큐, 드라마, 판타지를 기이하게 오간다. 김 감독은 다양한 장르를 모두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풀기위해 사용했다. 김 감독은 정부의 무지함, 제자 장훈 감독의 배신, 여배우를 잃을 뻔한 슬픔, 국내 배우들의 이중성을 거침없이 비난했다. ‘아리랑’에는 3년 간 두문분출 했던 김 감독이 얼마나 치열한 내적 고통을 겪었는지 표현돼 있다.

지난 13일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아리랑'은 은둔형 외톨이로 변한 김 감독의 오랜 시간이 그대로 투영돼 있었다.

‘아리랑’은 서울을 떠나 어느 오지의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김 감독의 모습과 함께 시작됐다. 수돗물도 화장실도 변변한 샤워시설도 없는 곳에서 김 감독은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했다. 고구마를 구워 먹거나 눈을 녹인 물로 라면을 끓여먹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김 감독의 트레이드마크인 짧게 손질한 헤어스타일도 온데 간데 없었다. 대신 김 감독은 봉두난발을 한 기인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아리랑’은 줄곧 김 감독 안에 위태위태하게 자리한 두 개의 자아를 비추면서 자아의 대화를 영상에 담았다. 영상에 담아 지켜보고 인물 역시 ‘아리랑’을 찍는 또 다른 김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질문하는 자와 대답하는 자, 지켜보는 자를 자처해 1인 3역을 펼쳤다.

‘아리랑’에는 ‘비몽’ 이후 작품 활동을 돌연 중단한 이유, 제자인 장훈 감독과 오른팔이었던 A 프로듀서의 배신, 폐인으로 떠돌고 있다는 소문에 대한 진실까지 한데 담겨있었다.

은둔자 김 감독은 ‘아리랑’ 속에서 그동안 쌓였던 세상을 향한 분노, 인생의 회한과 고민을 있는 그대로 쏟아냈다.


삶과 단절시켰던 두 가지 슬픔

2008년 김 감독의 ‘비몽’에서 이나영은 창살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하다가 목이 졸린 채 허공에 매달리는 사고를 겪었다. 당시 김 감독은 황급히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 이나영을 끌어내 구했다. 그리고 이나영은 자신의 사고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후 몇 년이 흘렀지만 ‘아리랑’속의 김 감독은 여전히 그 사건의 충격 속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김 감독은 “영화 찍다 사람 죽인 살인범 될 뻔해서, 그만 찍겠다고 한 거야?”라고 질문하면서 고통스러워했다. 또한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찍다가 사람 하나 잘못되면 무슨 의미야. 영화가 그렇게 위대한 거야?”라며 다그쳤다.

‘아리랑’을 통한 김 감독의 슬픈 회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풍산개’를 준비하던 장훈 감독과 김 감독의 오른팔이었던 A 프로듀서를 거론하며 배신의 아픔을 직설적으로 표출해냈다.

특히 김 감독은 장 감독에 대해 “유명 배우들이 캐스팅 됐으니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떠나는 방법이 잘못됐다”며 짙은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다. 이메일로 호소하고 비 맞으며 간절히 부탁해서 받아주니 자본주의의 유혹 때문에 배신했다는 것이다.


해외영화제 인정 덕에 한국서 훈장 받아

일련의 아픔 속에서도 김 감독은 ‘아리랑’의 희망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은둔자 생활 속에서도 질문자 김 감독은 “매일 술만 먹고 영화는 안 찍을 거냐. 그러니 배신당해서 폐인이란 소리를 듣는 거 아니냐”고 다그쳤다. 그리고 침체기에서 벗어날 것을 거듭 촉구했다.

그리고 이제 김 감독은 셀프 다큐멘터리 ‘아리랑’을 통해 전환점을 맞게 됐다. 국내 개봉 자체가 불투명할 정도로 민감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음에도 칸 영화제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다.

김 감독 역시 ‘아리랑’ 제작 과정을 철저히 비밀에 붙여 기대감을 높였다. 칸에 와서도 한국영화인을 전혀 만나지 않았고, 국내·외 언론의 인터뷰도 모두 거절했다.

칸 영화제를 통해 ‘아리랑’을 접한 외신들은 “셀프 카메라를 이용한 넋두리, 한풀이로 100분짜리 영화로 만들다니 놀랍다”며 치열한 작가주의 영화라 칭송했다.

이 같은 반응을 접한 국내 네티즌 또한 “참으로 김기덕 스러운 영특한 복수”, “당신을 힘들게하는 한국을 떠나 유럽에서 당신의 영혼을 마음껏 발산하라”며 김 감독을 지지했다.

씁쓸한 사회적 현실에 상처받은 김기덕이 ‘아리랑’을 통해 예전의 영화적 열정을 되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창환 기자] hojj@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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