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 ‘부당지시’ 의혹 사실일까?

<뉴시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지난 9일 대통령 탄핵심판으로 인해 전 국민의 눈길이 헌법재판소로 집중됐다. 하지만 그보다 하루 전인 8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 앞에서는 법원 공무원들의 기자회견이 열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사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양 대법원장이 사법개혁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는 이유였다. 법원 공무원들뿐만이 아니었다. 판사들도 공개적으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대법원은 지난 13일 진상조사를 결정했다. 법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법원 노조 “반헌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 자행했다”
국제법연구회…법원 대표 학술단체, 판사 400여 명 활동 중 

 
대법원이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는 의혹은 지난 8일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소속 공무원들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은 반헌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를 자행했다”면서 “국민 신뢰를 잃은 사법부 수장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퇴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에 앞서 대법원 국제인권법연구회는 최근 전국 법관 2900여명을 대상으로 ‘국제적 관점에서 본 사법독립과 법관인사제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설문 결과 500여명의 판사로부터 익명 답변을 받았다.

설문조사 내용은 법관 독립성 보장, 대법관 선출, 전관예우 등 6개 주제로 특정 정책에 반하는 선고를 내린 법관의 인사상 불이익, 청탁받은 경험 등 다소 민감한 내용도 담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결과는 오는 25일 ‘국제수준의 사법부 독립 확보를 위한 법관인사제도의 모색’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토론회에서 공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양 대법원장은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을 통해 연구회 소속 A판사에게 ‘설문조사 결과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않도록 하고 학회의 활동도 축소시킬 방안을 추진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법원장 연루설
판사들이 진상조사 요청

 
A판사가 이를 거부하자 “법원행정처로 발령난 지 2시간 만에 인사발령을 취소해 원래 소속 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노조 측은 설명했다.

노조는 “이러한 조치는 양심에 반하는 행위를 강요한 것”이라면서 “인사권을 무기로 일선 법관들의 개혁의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려는 양 대법원장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해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를 맡고 있는 김형연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이날 법원 내부 커뮤니티에 ‘대법원장님께 진상조사를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서를 통해 사실 확인을 위한 공식 조사를 촉구했다.

김 부장판사는 이 글에서 “법원행정처 차원에서 특정 학회를 조직적으로 와해시키려 하고 특정 세미나를 개최하지 못하거나 축소하도록 했다는 등이 언론에 보도됐다”며 “(고영한) 법원행정처장은 의혹이 사실이 아니며 해당 판사의 개인적인 부분은 알려줄 수 없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으나 법원 안팎의 의혹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법원장님께 법원을 사랑하는 충정으로 청원한다”며 “더는 법원의 신뢰가 무너지지 않게 대법원 차원에서 공정한 조사기구를 만들어 의혹의 시선들이 법원을 바라보지 않게 진상을 조사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국제법연구회는 지난 2011년 설립된 법원의 대표적 학술단체다. 현재 현직 판사 400여명이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인복 교수 진상조사 맡아
임종헌 차장 사의 표명

 
대법원이 판사들의 사법개혁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전국 일선 법원장들이 모여 진상을 명확히 파악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대법원은 9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전국 법원장 회의를 열고 의혹의 진상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조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고영한 법원행정처장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 전국 법원장들은 조사 절차 등과 관련해 객관적·중립적인 기구를 통해서 신속하고 공정하게 조사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고 처장은 인사말을 통해 “사법부 대내외적으로 큰 변화를 마주하는 중요한 시기에 법원장들의 훌륭한 리더십으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면서 “집사광익(集思廣益)의 자세를 보여달라”고 당부했다. ‘집사광익’이란 관직에 있는 자가 여러 의견을 모아 나라의 이익을 넓혀야 한다는 의미다.

이날 전국 법원장들은 사법행정위원회 제도 안착 및 활성화, 구속사건 논스톱 국선변호, 독촉절차 및 이행권고명령 활성화, 불법행위 유형별 적정 위자료 산정방안, 법정 중심 형사재판 강화, 사회적 소수자 우선지원창구 확대·설치, 후견사건 실무 운영, 가정법원 보호사건 및 보호명령사건 효과적 집행, 전국 법관 애로사항 및 건의사항 등도 논의했다.

법원장 회의 후 대법원은 지난 13일 진상조사 실시를 결정했다. 진상조사는 이인복 사법연수원 석좌교수가 맡기기로 했다.

대법원은 이날 “양승태 대법원장이 최근 현안의 진상규명을 위해 이 석좌교수에게 명확한 진상조사를 요청하면서 조사와 관련한 모든 권한을 위임했고, 이 석좌교수가 이를 수락했다”고 밝혔다.

이 석좌교수는 13일 전국 법관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조사 절차가 이뤄지기 위한 전제로 이번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임 차장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건의했고 양승태 대법원장이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법조계에 따르면 임 차장은 최근 사의를 표명하며 법관 재임용 신청 의사를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판사 임용 30주년인 임 차장 임기는 3월 19일까지였다. 판사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10년 단위로 임기가 연장된다.

한편 법원 내부에서 한 단체가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진보 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가 사법 개혁을 요구하며 요직을 꿰차는 등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 국제법연구회 논란은 당시와 성격이 다르다. 내부 개혁의 목소리에 소위 위에서 제동을 건 것이다. 게다가 국제법연구회는 우리법원구회와 달리 특정 이념을 가진 집단의 모임이 아니다. 소속 법관의 규모도 우리법연구회보다 훨씬 클 만큼 많은 법관들이 참여하고 있다. 진상조사 결과에 따라 대법원장의 진퇴 문제도 결정될 수 있는 만큼 그 결과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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