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이 서열중시한 기존 관행대로 대법관 후보자 제시”소장판사들 “법원개혁 목소리 무시한 처사” 집단 반발움직임대법원 “합리적 대안없이 서열만 파괴한다고 개혁되나” 맞서사법개혁 추진 밝힌 청와대도 적극개입 가능성사법부가 흔들리고 있다. 신임 대법관 임명 제청을 둘러싼 파문이 혼미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 인선을 둘러싸고 대법원과 소장판사간 갈등에서 벗어나, 사법부 안팎의 보수 vs 개혁간 대결 국면으로까지 증폭되고 있다. 특히 ‘청와대 vs 사법부’ 등 권력기관간 마찰까지 예상되고 있어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제 4의 사법파동’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들여다봤다.

최근 신임 대법관 임명 제청을 둘러싼 사법부의 갈등은 지난 12일 대법원에서 비공개로 열린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회의’에서 촉발되기 시작했다. 이날 자문회의에는 윤관 전 대법원장, 강금실 법무장관, 박제승 대한변협 회장, 이강국 법원행정처장, 송상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등이 참석했다. 당초 자문회의는 최종영 대법원장이 제시한 제청대상 후보자(김동건 서울지법원장, 김용담 광주고법원장, 이근웅 대전고법원장 등)의 적정성 문제와 적격여부 등에 관한 토의를 벌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강금실 법무장관과 박재승 변협회장이 대법관 후보자의 적정성과 회의 방식 등에 불만을 품고 퇴장한 뒤 자문위원을 사퇴했다. 이들은 “대법원측에서 제시한 후보대상자들이 법관의 서열과 기수 등을 중시한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반발했던 것이다.

법원은 이에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은 우리 헌법이 사법권 독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대법원장에게 부여한 고유 권한”이라며 “국민이나 특정 단체가 대법관 후보자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국민의 사법참여라는 차원에서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을 사실상 제약하는 방향으로 의견 개진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헌법 질서를 위배하는 행위”라고 맞섰다.이어“제시된 후보자에 대하여 불만이 있다고 해서 자문위원회 회의장에서 중도에 퇴장한다거나 자문위원회 위원직을 사퇴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은 행동”이라며 “제청대상자 모두 30년 가까이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법관으로서의 자세나 재판실무능력은 법원 안팎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고 반박했다.대법원은

이와 함께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에 관한 요구는 현재의 대법원의 기능과 역할에 따른 현실적 제약 때문에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애로가 있다”며 “조만간 임기 만료가 예정된 한대현 헌법재판관의 후임 인선에 있어서는, 대법원과는 다른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여, 재판실무능력보다는 소수자보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적절히 대변하고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물을 제청할 것”이라고 밝히며 수습에 나서고 있다.18일에는 사상 처음‘전국법관회의’를 개최, 전국법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또 대법원은 기존 방침에 변함없이 신임 대법관으로 자문위원회에 추천됐던 3명중 1명을 노무현 대통령에게 제청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하고 있다.

대법원이 이같은 해명과 사태진화에 나섰지만, 그 파문은 계속해서 증폭됐다. 법원안팎에서 특히 대법관 제청 인선이 기존 방침대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대법원장 사퇴 요구 또는 집단 사퇴 등 집단 행동 방침을 세우고 있다. “기존 관행대로 서열에 따른 대법관후보 제청은 그간 계속 제기됐던‘법원개혁’의 목소리를 무시한 것”이라며 집단행동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처럼 사법부의 갈등은 법원내부에서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서울지법 북부지원 이용구 판사 등 소장판사들이 연판장을 만들고 집단행동에 나서고 있다. 이 판사는 지난 13일 법원 내부게시판에 ‘대법관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이라는 제목으로 연판장을 올렸다.이 판사는 글에서 “현재까지 진행된 대법관 인선 과정은 사법부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을 좌절하게 하고 있다”며 “우리 법원은 지금 ‘대법원은 못 믿겠다’는 종래의 불신을 불식시키고 개혁의 주체로 나설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개혁의 대상으로 남을 것인가를 선택할 기로에 놓여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이미지를 청산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 판사의 연판장에 대해 소장판사들이 대거 동참하고 있다. 1,800여명의 법관들 중 소장판사들을 중심으로 100∼200여명이 연판장에 동조하고 있는 상황이다.이와 함께 일부 중견 판사들도 집단행동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등 많은 법관들이 이번 사태에 공감하고 있어 파장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문흥수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법원 사내 통신망에 지난 12일 올린 글을 통해 “기존 관행을 고수한 대법원장의 대법관 인사추천에 대한 일선 판사들의 판단이 예상외로 심각한 상황”이라며 “핵심 부장판사들이 집단사퇴를 포함한 적절한 의사표시 방법에 대해 숙의를 하고 있다”고 밝혀 집단행동 가능성을 시사했다.문 부장판사는 이어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은 다양한 성향의 법조인사로 충원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당한 주장을 곡해하고 소수의 주장으로 폄하하려 들면서 개혁에 반대하는 기득권자들이 마피아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박시환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지난 13일‘항의성 사직서’까지 제출하기도 했다. 박 판사는 ‘법관직 사직의 변’을 통해 “신임 대법관 선임 내용은 기존의 방식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라면서 “법관으로서 부끄러움과 죄송스러움을 짐지는 방법으로 법관직을 사퇴하고자 한다”고 밝혔다.이와 같은 법원 갈등은 계속해서 증폭되며, 사법부 안팎의 ‘보수와 개혁’세력간 충돌로 비화될 움직임마저 감지되고 있다. 대법원 등으로 대표되는 사법부의 ‘보수’진영과 법원내 소장 개혁파·재야 법조·시민단체의 ‘개혁’진영간 대결양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 소장 판사들은 단체 행동에 나서기까지 했다.

‘사법 파동’이 예고되는 움직임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기존 서열에 근거해 후보를 추천한 것은 사법부 독립과 법원 조직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합리적 대안 없이 서열만 파괴한다고 법원이 개혁된다는 것은 맞지 않는 논리”라고 강조하고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개혁성향의 법조인들이 행동을 취한다면, 이에 맞대응하며 집단 움직임도 불사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이에 대해 개혁진영에서는 “이번 대법관 후보자 제청파문은 법원개혁이라는 사회적 요구를 대법원이 외면하면서 발생했다” 며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발생한 법원내·외부의 비판을 ‘고유권한 침해’, ‘무책임한 행동’ 등으로 호도하는 것은 대법원이 권위주의의 잔재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맞대응했다.

이번 갈등은 ‘청와대와 대법원’두 권력기관의 싸움으로 번질 소지도 담고 있다. 청와대 내부에서 대법원장의 임명 제청 인사에 대해 대통령이 국회 동의안 제출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거론하고 나섰다. 청와대는 겉으로는 “사법부일에 대해 섣불리 나설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등 청와대는 그간 “연공·서열파괴 인사 등을 통해 강도높은 사법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동안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사법개혁기구’를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사법개혁에 칼날을 곧추 세웠다. 그러나 대법원이 자체적으로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를 만들어 행정부의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나 박재승 대한변협 회장 등을 자문위원으로 참여시키며 자체 개혁에 나서자 청와대는 잠시 사법기구의 추진을 유보했었다.

이에 따라 이번 사태에 청와대도 적극 개입할 뜻이 있음을 밝힌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대법관 임명제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그 역풍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이미 검찰파동을 경험한 바 있는데, 이번에‘사법파동’까지 겪게 된다면, 통치권에 치명타를 받을 가능성이 짙다.따라서 청와대가 ‘사법부’에 대한 칼날을 곧추 세울지 여부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청와대’와 ‘사법부’가 맞설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이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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