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길을 잃었다. 더 솔직하게는 갈 곳마저 없어 보인다. 결집의 구심점이 없어 이쪽저쪽에 기웃거려보는 참 딱한 처지로 내몰린 것 같다. 
보수 성향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정치교체’를 외칠 때만 해도 보수에게 그나마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그런 반 총장이 귀국한 지 20여 일만에 허무하게 깃발을 내리고 말았다. 잠시 충격에 휩싸였던 보수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총리를 대체재로 삼아 그에게 ‘보수의 아이콘’이라는 별칭까지 붙여주며 보수 결집의 불씨를 살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으로 청와대를 나오게 되면서 그 역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해 보수는 다시 패닉 상태에 빠졌다. 탄핵정국에서 이미 한 차례 분화된 바 있는 보수 정치권이 반 전 총장과 황 대행의 불출마로 또 다른 형태의 분화 조짐을 나타내 소위 ‘신(新)보수’니 ‘범(汎)보수’니 하는 변신을 꾀하고 있다. 
문제는 이로 인해 갈 길 잃은 보수지지층이 자칫 패배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연일 진보 진영에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대며 대선 판세가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반해 보수 진영은 각자도생(各自圖生)과 정체 모를 화학적 결합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부활만을 노리고 있는 터다. 실낱같은 재집권의 기대마저 점차 사라지는 형국이니 차라리 이번 대선에 ‘기권’하겠다는 보수 지지층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같은 보수의 비극은 과연 어디서 시작됐을까? 물론 진보 세력의 보수 기득권에 대한 파상적인 공격을 제일 큰 이유로 들 것이다. 야권은 이번 대선 프레임을 ‘정권교체’로 정하고, 그 당위성을 보수의 부패기득권 타파에 두면서 끊임없이 보수 진영을 괴롭혀 왔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사회 전 분야의 비리 심화와 최순실 사태를 빌미로 보수 세력은 깨끗하지도, 따뜻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킨 전략이 박 전 대통령에 실망한 중도보수층에 적절하게 먹혀들었다. 
이 보수의 비극은 벌써 지난 총선 목전에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일으킨 이른바 ‘옥새파동’으로 준비된 것이다. 당시는 야당의 분열로 새누리당의 압승이 예상돼서 많게는 180석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박 전 대통령과 각을 세워왔던 김 전 대표가 ‘친박(朴)’계의 당 장악을 방해하기 위해 대표 직인을 들고 부산으로 도망치는 희대의 코미디를 연출했다. 이를 지켜본 성난 표심이 더불어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고 김 전 대표는 한방에 여소야대로 판을 뒤집은 역사적 인물로 등장했다. 
만일 ‘옥새파동’이란 게 없었으면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더욱이 탄핵사태 같은 것은 일어날 수조차 없었을 일이다. 그런데도 김 전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을 만난 게 정치 인생 중 가장 후회스럽다”고 했다. 이는 오히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내 정치 인생에 김무성 전 대표와의 인연이 가장 후회스럽고 가슴 아프다’고 말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