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의결권 쥐고 ‘거수기’ 역할 충성

▲ <뉴시스>
[일요서울 | 신현호 기자] ‘자본시장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국민연금공단을 두고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사명감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크고 작은 문제가 불거지며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한 게 사실이다. 더구나 최근 최순실 사태의 ‘트라우마’와 대우조선해양 지원 ‘딜레마’의 이중고로 신음하는 상황에서 거수기 논란까지 가세했다. 기업 의결권 행사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함에도 찬성 또는 기권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다. 거대 자본을 기업 주식 등에 투자해 수익률을 꾀하는 만큼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메스를 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 한 해 560조 원의 자금을 굴리는 국내 최대, 세계 3위 규모의 연기금이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100조 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채권 투자액만도 282조 원이나 되는 큰손이다.
 
국민연금이 우리나라 국민의 노후자금인 만큼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기금을 운영하는 주체인 ‘기금운용본부’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은퇴 후 ‘기금이 얼마나 잘 운용되는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수익률 증대를 위해 국내 기업 주식에 투자한다. 특히 대기업의 지분을 상당 부분 보유하고 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지난 1월 6일 기준 국민연금이 5% 이상 대량지분을 보유한 10대 그룹 계열 상장사는 모두 58곳이다. 10대 그룹 전체 상장사의 65%에 달하는 수치다(지난해 9월 말 기준 89곳).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가 279곳인 점을 감안하면 10대 그룹 상장사가 5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셈이다.
 
이 상장사들의 주식가치 평가액은 같은 날 기준 57조2923억 원에 달했다. 국민연금이 국내 증시에서 사들인 상장사 전체 주식 보유액(102조 원)의 절반이 넘는 액수다. 대기업집단 계열사 위주의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10대 그룹 중 국민연금이 5%를 넘는 대량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는 삼성이 가장 많다. 국민연금은 삼성 상장 계열사 11곳의 지분을 5% 이상 갖고 있다. 주식가치 평가액은 28조4522억 원에 달한다. 호텔신라는 최다 지분인 9.84%를 보유 중이며 그 다음은 삼성전자 지분(8.96%)으로 단일 주주로는 가장 많다.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의결권 행사를 두고 적정성 논란이 되고 있는 삼성물산(5.78%)을 포함해 삼성SDI(8.19%), 삼성엔지니어링(5.02%), 삼성전기(9.32%), 삼성증권(8.15%), 삼성화재(9.11%), 삼성생명(5.0%), 에스원(6.82%), 제일기획(9.20%) 등의 지분을 보유 중이다.
 
국민연금은 현대차그룹 8개 계열사의 지분도 5% 넘게 갖고 있다. 대량지분 보유 상장사는 현대차(8.02%), 현대글로비스(9.90%), 현대건설(11.20%), 기아차(7.08%), 현대모비스(9.02%), 현대위아(8.14%), 현대제철(6.95%), 현대로템(5.07%) 등이다.
 
이는 곧 국민연금이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방증한다. 삼성전자는 올해 인적 분할과 지주회사 전환을 추진하며 삼성SDS 정보기술(IT) 사업부를 합병하고 추후 지주회사가 삼성물산과 합병할 것으로 점쳐진다. 인적분할과 합병 등의 과정에서 주주들의 의결권을 행사한다면 국민연금이 핵심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현대차그룹도 지배구조 개편을 앞두고 있다.
 
이동걸 동국대 경영대 초빙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기금이 늘어나 국민연금은 국내 핵심 상장사 주식을 더 사들여 기업 운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며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절차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거수기 논란’

 
문제는 국민연금이 이런 막대한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의결권은 행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500조 원짜리 거수기’라는 비판을 받는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해 586개사 3344건의 의안 가운데 89.5%인 2994건에 대해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를 표명한 안건은 320건으로 9.6%에 불과했다. 그나마 반대의사 표명 비율이 가장 높았던 안건은 배당이었다. 총 27건의 안건에 대해 20건을 반대했다. 배당은 국민연금 수익률과 직결된 사안인 만큼 배당 비율 등이 기대에 못 미칠 경우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대로 주식(7.3%), 보수(2.1%) 등 안건에 대해서는 반대표 행사 비중이 크게 낮았고 ▲ 합병과 분할 ▲재무제표 승인 ▲이익잉여금 처분 등에 대해서는 단 한 건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10대 그룹으로 범위를 한정하면 반대표 행사 비율은 7.5%로 더 낮았다. 국민연금은 10대 그룹의 주총 안건 426건 가운데 32건을 반대했으며, 393건(92.3%)을 찬성했다.
 
국민연금은 기업마다 경영여건·사업환경 등이 다양할 뿐 아니라 투자자마다 투자 여건이 다른 점을 감안할 때 반대 행사 비율만 놓고 적극적, 소극적을 구분 짓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지침에 따라 장기적으로 주주가치 증대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2015년 7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자산운용사의 의결권행사 점검 결과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반대 비율은 9.1%를 기록했다. 이는 운용사의 반대 비율 2.2%에 비해 4배 이상 높은 수치라는 게 국민연금의 설명이다.
 
2015년 4월 대신경제연구소가 발표한 기관투자가의 의결권행사 분석 결과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반대 비율은 8.6%이며, 다른 기관의 반대 비율은 2.2% 수준에 불과했다고 국민연금은 지적했다.
 
그러나 적절한 비교대상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자본시장의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큰 규모의 자산을 운용한다. 실제로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자신이 최대주주인 경우도 있다.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일반 자산운용사와 다르다는 것이다. 일반 운용사가 대기업 상장사의 대주주가 되기는 어렵다. 대기업의 경우 여러 계열사와 관계기업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더욱 의결권 행사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주주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해야 투자회사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이는 한국 자본시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와도 직결된다”며 “국민연금을 옹호하는 입장도 있지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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