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도 못 먹고, 야근은 기본, X욕 먹는데 ‘열정 페이’

고인 A씨 동생의 1인 시위 모습 <사진=신입조연출사망사건 대책위 트위터>
신입 PD A씨, 살인적 노동·직장 내 괴롭힘 시달려
“노동 착취·상명하복 따라 사람 쥐어짜는 관행 타파해야”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케이블 채널 신입 PD 사망’ 사건으로 인한 후폭풍이 거세다. 부당한 방송계 노동 환경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것. 대기업 9개월 차 A(28) PD가 고된 제작 환경과 폭력적 사내 분위기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방송계 구성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비상식적 대우에 대한 개선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16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 구성원들은 장시간 노동과 폭언·욕설, ‘열정 페이’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에서 나타나는 ‘화려한 화면’ 뒤에 정작 방송을 만드는 구성원들은 사실상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요서울은 전·현직 방송관계자들의 말을 통해 방송계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들여다봤다.
 
한 케이블 채널 신입 조연출이었던 PD A씨는 지난해 10월 중순 무렵 실종됐다가 담당 드라마 종영 이튿날인 26일 숨진 채 발견됐다. A씨 사연이 알려진 계기는 A씨의 동생이 자신의 형이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글을 최근 페이스북에 올리면서부터다.
 
이후 청년유니온과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26개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으로 구성된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A씨는 장시간 노동과 과도한 업무 부여 등 극심한 노동 강도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촬영을 시작한 지난해 8월 27일부터 실종된 날까지 55일 동안 단 2일만 쉰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 기간 발신한 통화 건 수만 1547건으로 나타났다. 촬영이 바빴던 9월 20일에서 29일까지 A씨의 수면시간은 평균 4.5시간으로 파악됐다.
 
이 밖에도 A씨는 군대식 조직문화 속에서 갖은 언어폭력과 괴롭힘을 당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두고 회사 측은 ‘이례적인 수준의 따돌림이나 인권 침해는 없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대책위가 공개한 A씨와 선임 PD와의 대화 녹취록, 담당팀 내 단체 채팅방을 보면 회사 측 주장은 사실과 달라 보인다. 내용을 보면 ‘진짜 한 대 후려갈길 뻔했다. 너 퇴사에 대한 고민하고 있으면 지금 나가라’, ‘이한빛 X새끼야’, ‘신입사원은 원래 그런 일 한다’ 등의 폭언과 욕설이 확인됐다.
 
A씨가 근무했던 케이블 방송사 관계자는 이 사건과 관련해 “유가족의 아픔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당사는 경찰 등이 조사에 나선다면 적극 임할 것이며, 조사 결과를 수용하고 지적된 문제에 대한 개선 방안을 마련하는 등 책임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방송업계 종사자
‘고통 토로’…“서럽다”

 
방송 업계의 고된 노동환경과 수직적·군대식 조직 문화, 폭언·욕설 등 비인간적 대우 등은 공공연한 비밀로 통용된다. 전·현직 방송관계자들이 일요서울에 밝힌 방송계 노동 환경의 실상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살인적인 노동 시간과 ‘열정 페이’, 폭언·욕설 등에 따른 고통을 토로했다.
 
외주업체에서 예능 VJ로 활동하고 있는 경력 1년의 윤모씨(24·여)는 “야근은 기본이고 밤늦게 끝나는 촬영이 많다. 밥 먹는 시간도 불규칙하다. 이렇다 보니 짬 내서 밥을 먹으려 하면 금방 스탠바이가 다가와 음식을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윤 씨는 또 “처음에 50만 원 받으며 일했다. 대부분 근로계약서는 작성하지 않는다. 물론 4대 보험도 없다”며 “퇴직금 못 받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퇴직금 소송을 벌여 승소하기도 하지만 방송계는 인맥싸움이다 보니 (이 경우) 현장에 복귀하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이어 “메인 PD는 방송사 직원이고, 나는 외주업체의 직원이지만 일부 PD는 나를 자신의 직속 부하 직원처럼 막 대하고 욕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탄했다.
 
2년간 예능 촬영팀에서 일한 김모씨(26·여)도 “별도의 근로 계약서를 작성한 적 없다”며 “사람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저도 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 일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 권고사직을 당했는데 퇴직금을 절반 정도 밖에 못 받았다”고도 했다.
 
카메라 촬영 보조로 18개월 동안 일한 이모씨(여·23)는 “하루에 한 끼도 못 먹고 일한 적 많다. (이 때가) 가장 서럽다”며 “쉴 때도 편히 쉬질 못한다”고 했다. 이 씨는 또 “(상사들이) 이X끼 저X끼는 기본”이라며 “쉬는 날에도 전화해서 화내며 욕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울먹였다.
 
방송계 경력 7년의 드라마 프리랜서 작가 A(33·여)씨는 “보조작가의 경우 자발적 ‘열정 페이’로 들어오는 경우가 정말 많다”며 “이를테면 평소 동경했던 작가의 보조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식인데, 여기서 많은 열정 페이가 비롯된다고 본다. 상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가르쳐준다 배운다 이런 합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착취’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실태조사 보고서’
노동 현실 ‘빨간불’

 
‘2016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 업계 프리랜서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이들이 서면으로 근로계약을 한 경우는 15명 중 1명에 불과했고, ‘구두계약’이 68.8%에 달했다.

막내작가의 경우 ‘열정 페이’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시간당 급여가 3,880원에 불과했다.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53.8시간에 달했으며, 급여 체불을 경험했다고 응답한 사람이 46%로 절반가량이었다. 4대 보험 직장가입은 1~2% 정도에 불과했다.
 
언론노조는 이번 A씨 사망사건을 계기로 이 같은 방송계의 살인적인 노동 강도와 부당한 관행, 방송사의 불법 행위, 노동 착취 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노조는 “입사 9개월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신입 PD의 죽음은 오늘날 방송콘텐츠 제작에 종사하는 청년 노동자들의 현실을 웅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파견, 도급, 용역, 프리랜서 등 비정규직이 넘쳐나 ‘비정규직 박물관’으로 불리는 방송 콘텐츠 노동현장을 근본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며 “장시간 노동과 상명하복 체제로 사람을 쥐어짜는 관행을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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