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 정치가 ‘정치인’을 위해 있단 냉소를 넘어서야
- 특권 걷어내면 시민들도 호응할 것

 
적폐 청산이 화두다. 본래 적폐란 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이후 쓰면서 정치권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 입장에선 참사가 자신들의 잘못은 아니고 지금까지 쌓여온 부조리 때문이라는 면피의 용어였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부를 넘어 대한민국의 문제를 보여준다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뒤에 ‘청산’까지 붙여 ‘적폐 청산’이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 선거캠페인에서 이 단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자유한국당뿐만 아니라 과거 자유한국당 지지층이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에게 지지를 보내는 모습이 관철될 때엔 안철수 후보에게도 적폐라는 공세를 퍼부었다.
 
적폐 청산을 말한다면 정치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정치권은 국민에게 선출되는 영역이라 타율적인 규제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다. 일정 수준 이상의 법리적 잘못을 저지르면 당선 무효지만, 정치권의 대부분 행위들은 법리적 규제의 영역 밖에 있다.
 
또한 정치권은 다른 영역에 비해 인적 쇄신이 잦은 분야다. 유권자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 전과 다른 정치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중심 경제라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경제 분야보다 더 쇄신에 민감한 분야가 정치다.
 
그렇게 많이 물갈이 되는데도 왜 정치권은 국민들의 불신을 떨쳐내지 못할까. 물론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말까지도 한국 정치는 이른바 삼김시대라고 불린 지역주의 보스정치의 틀 위에 있었다.
 
삼김의 퇴장 이후 보스정치는 약화되었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상승과 함께 팬덤정치라는 새로운 현상이 왔다. 노무현에게 팬덤이 생긴 이유는 지역주의에 대한 도전 때문이었기에, 당장은 좌절이 누적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주의 역시 약화되고 있다. 정치권의 주요한 갈등 축이 지역에서 세대로 옮겨가고 있는 정황이 보인다.
 
특권, 철새, 지역주의, 계파
 
변했지만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국민들이 싫어하는 어떤 부분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며칠 전 화제가 된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의 ‘노룩 패스’ 캐리어 사건을 생각해보자. 이는 한국 사회의 ‘갑’이라 여겨지는 사람들이 하급자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선거 때마다 유권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정치인은 ‘을’들을 위해 ‘갑’을 제어하는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실생활에선 ‘갑’의 먹이사슬 맨 꼭대기, 특권의 정점에 서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치 자체를 불신하고 무시하는 정서가 사라지지 않는다. 안철수 의원은 초년 정치인 시절에 ‘국회의원 정수 축소’를 주장한 바 있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뿌리 깊은 것이다.
 
당적을 바꾸는 ‘철새 정치인’ 논란도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인은 이념도 원칙도 없이 본인의 당선 가능성을 찾아 배회하는 자영업자일 뿐이라는 냉소적 인식의 근원이 된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지 않다. 한국 사회의 정당정치적 기반이 너무 허약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분열하고 통합하며, 동일한 세력인 데다 유권자들의 불신에 직면하면 재빨리 이름을 바꾼다. 어떤 이는 현실적으로는 계속 같은 세력 안에 속해 있었는데 형식적으론 당적이 서너 번 바뀐 것처럼 여겨진다.
 
약화되었다지만 지역주의 역시 혁신의 장애물이다.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이 강세를 보이니 민의를 대변하려는 노력을 덜 기울이게 된다. 오랜 세월 지역주의의 양대 축 중 하나였던 호남은 유권자들 스스로가 이 상황을 버티지 못해 적극적으로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국민의당이 별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음에도 정치권에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오히려 피해자이면서 저항자의 입장이었던 호남에서 먼저 이런 선택이 이뤄진 데에 대해, 영남 유권자들이 어떤 선택으로 화답할 것인지가 궁금해지는 시점이 왔다.
 
보스는 사라졌지만 계파의 무의미한 갈등은 여전하단 것도 문제다. 계파가 이념이나 노선을 대변한다면 건전한 경쟁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민주당 내 친노와 반노, 혹은 친문과 비문 간에 어떠한 정치경제적 쟁점이 존재하느냐고 물으면 답하기 어렵다. 인물들의 친소관계가 기준이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정치가 사회를 위해 작동하지 못하고, 정치인 자신을 위해 작동하고 있다는 냉소적 인식을 구성한다. 올바른 사람을 정치인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유권자의 몫이다. 하지만 여의도 정가나 언론계 사람들은 정치인 개인들은 제법 괜찮은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의 의지가 현실정치에서 구현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만을 핑계로 삼을 수 없다. 이번 대선은 지난 수십 년간 사람들이 생각했던 정치권의 상수들이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 선거였다. 그만큼 유권자들은 변화를 갈망하고, 스스로 변하고 있다. 정치가 사회를 위해, 자신들을 위해 기능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치가 냉소를 떨치고 이 기대에 호응하려면 결국 정치 본연의 기능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시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제도와 문화를 동시에 바꿔야
 
제도적인 노력과 문화적인 노력이 동시에 요구된다. 시민들은 대선 전 졸속 개헌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개헌을 원하는 욕망이 높다는 것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주고 있다. 단임제 특성상 정권 초 개헌을 논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개헌을 말하고 있다. 정치권이 시민들을 더 잘 대변하기 위한 어떠한 개헌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좀 더 작은 틀에서의 선거법 개정, 정부 조직 개편 등의 논의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개혁 의지를 천명하는 시대에 의회는 자신의 역할을 증명해야 한다. 스스로 특권을 걷어내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시민들은 냉소를 거두고 국회의원 정수 축소가 아니라 확대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