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라는 아늑한 섬의 품안에는 바다에서 건져 올린 보물이 한가득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해안 길을 따라 펼쳐진 바다에는 남국의 바다가 품은 이국적인 정취가 배어 있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은 여행자의 마음을 언제나 설레게 만든다.
슬그머니 다가와 눈 깜빡하면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없을 이 계절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싶어 지도를 펴고 남쪽의 도시들을 짚어보았다. 아이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을 닮은 섬, 남해가 눈에 들어왔다.
40년이 넘도록 남해의 관문 역할을 해오고 있는 남해대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노량해협 위로 이어진 대교의 주황빛이 여전히 선명하지만 머지않아 바로 옆에 새로 지어지고 있는 신 남해대교에게 그동안 짊어져 왔던 무게를 옮겨줄 예정이다.
별이 저문 자리,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충렬사에서 나와 관음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장관을 지나 ‘이락사’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에 닿았다.
당시 충무공의 순국지인 관음포에 충무공을 기리는 유적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이순신 장군의 8대손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부임한 이항권이 왕에게 건의해 사당을 짓고 유허비를 세운 것이 지금에 이른다.
당당하게 세워진 충무공 순국 400주년 기념비 뒤로 땅에서부터 붉은 가지를 여러 갈래로 뻗으며 자라난 반송들이 만들어내는 운치 있는 오솔길이 이어진다. 구불구불 뻗어있는 솔가지의 모습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애끓는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다.
비각의 뒤편으로 이어진 소나무 길을 따라 첨망대에 도착하니 노량해협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급박했을 전장의 흔적은 바람과 파도에 사라졌지만 임전무퇴의 충혼은 영원히 노량바다에 서려 있는 듯하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남면 해안도로로 접어든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쪽빛과 에메랄드빛이 뒤섞인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이국적인 풍광을 빚어내고 차창 밖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은 더없이 아늑하다.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벗어둔 삿갓을 들어 보았더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있었다는 ‘삿갓배미’ 일화에는 산비탈의 자투리땅도 논으로 만들어 활용해야 했던 이곳 주민들의 고달팠던 삶이 해학적으로 녹아 있다.
풍요롭지 않았던 지난날, 먹고 살기 위해서는 가파르고 척박한 땅에라도 논과 밭을 일구어야 했다. 땅을 고르고 거기서 나온 돌로 석축을 쌓고 다시 땅을 고르는 일이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 오랜 세월 쌓여온 피땀이 지금의 다랭이 논에 남아 좁고 가파른 길을 내딛는 발걸음마다 다랭이마을을 일궈온 이들의 억척스러움이 지그시 밟히는 것만 같다.
조선 영조 27년, 이 고을 현령의 꿈에 한 노인이 “가천에 묻혀 있는 나를 일으켜 달라”고 부탁해 땅을 파 보니 암수바위가 나타났다고 한다. 높이 5.9m의 수바위와 4.9m의 암바위로 이뤄진 암수바위는 각각 남성과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원예예술촌은 20명의 원예인들이 집과 정원을 개인별 작품으로 조성해 이룬 마을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길 양옆으로 색색의 꽃 들과 알록달록한 조형물들이 이어져 완연한 봄 느낌이 풍긴다.
독일마을은 1960년대 독일로 파견돼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한 독일 교포들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남해군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해준 곳이다.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독일 문화를 경험해볼 수 있는 여행지로 널리 알려지며 남해를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그럼에도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왔던 것처럼 푸른 남해 바다와 초록 언덕으로 둘러싸인 남해의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이다.
통상적으로 어부림은 물고기가 살기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 물고기 떼를 유인하려고 만든 숲을 말하지만 물건리 방조어부림은 강한 바닷바람과 해일 등을 막아 농작물과 마을을 보호하는 방풍림의 역할이 더 크다.
현재 300년 된 40여 종류의 수종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방조어부림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돼 있다. 숲속으로 잘 정돈된 꼬불꼬불한 산책로는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평탄하고 한적한 길로 나뭇가지 사이로 바다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깊은 숲에 들어온 것처럼 신비로운 분위기가 스며 있다.
비단결처럼 고운 모래, 상주은모래비치
상주은모래비치는 은빛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넓은 백사장이다.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아름다운 전경에 차를 잠시 멈추고 보니 바로 상주은모래비치다.
신발을 벗어 맨발로 모래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껴본다. 2킬로미터에 이르는 반달 모양의 백사장을 따라 바닷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고운 모래 위를 거닐어보기도 하며 봄이 찾아든 남쪽의 바다를 느껴본다.
남해가 품은 최고의 보물은 금산 보리암이 아닐까. 해발 704m의 그리 높지 않은 금산은 산 전체에 기암괴석이 빚어내는 눈부신 비경들이 숨어 있다.
보리암에 앞서 들른 곳은 금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망대.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에 금산과 남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정상까지 올라온 수고로움을 단번에 잊게 만든다. 상주은모래비치와 앞바다에 떠 있는 많은 섬들이 해안선을 아름답게 수놓은 모습에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금산 일출이 얼마나 황홀한 풍경을 선사할지 상상해 보게 된다. 높은 곳에 오르니 자연스레 지나온 길들을 되짚어 보게 된다.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프리랜서 박건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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