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초여름 이 땅은 ‘오-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붉은 악마들의 함성으로 진동했다. 당시 나라 사정은 경제 침체로 인해 국민들 마음에 어둠이 짙게 드리워질 무렵이었다. 그런 가운데 월드컵축구는 4강 신화 창조를 위한 돌진을 거듭했다. 물론 선수들의 넘치는 기량과 히딩크 감독의 탁월한 용병술이 돋보인 것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4강 승리가 그들만의 노력과 기교로 성취된 것이 아님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국민들이 ‘스포츠가 밥 먹여 주느냐’고 방관하거나 시큰둥했다면 결과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다 쳐도 그건 그들만의 잔치로 의미가 축소되고 빛이 퇴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월드컵 16강전 승리의 낭보를 접하면서 시작된 붉은 악마들의 결집현상은 태산준령이라도 무너뜨릴 기세로 활화산 폭발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혈기의 응집력은 정말 믿음직스러웠고 눈물 날만큼의 감동을 자아냈다.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대한민국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나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국가 장래를 의심치 않는 쪽으로 마음을 모을 수가 있었던 모처럼의 쾌거였다. 그리고 그 같은 젊음의 힘찬 발산은 곧이어 2002년 12월 대선에서 이 나라 정치 역사를 한번 바꿔보자는 쪽으로 기세를 부려 노무현 정권을 출범 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바야흐로 젊음의 향연이 시작되고 거센 세대교체 바람이 지축을 뒤흔들면서 세상판세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갔다.

지난 1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개혁세력의 기수를 자임하는 집권 여당의 대표가 노년층을 향해 선거일에 투표 안 해도 괜찮으니 집에서 쉬라고 하는 지경까지 됐다. 60~70대는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들이라고 했다니 너무 놀랍고 황망해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발언 파장이 커지자 당사자를 비롯한 열린우리당이 공식 사과하고 사태 수습에 적극 나서긴 했지만 문제가 결코 간단치가 않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발언이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정치지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어쩌면 그것이 집권세력 전반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슬프고 우울한 역사를 수놓는 꼴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 온갖 궂은 일을 마다않고 작게는 내 자식들의 교육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심초사해왔던 어른들이 개혁세력의 구심점에 의해 그처럼 무참하게 무시당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미래의 희망이 없는 슬프고 우울한 역사를 수놓는 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세상 돌아가는 형국이 불안하고 위험스럽기가 그지없어 나라 걱정 때문에 국무총리를 지낸 국가 원로 13명이 한뜻으로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는 전대미문의 시대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터다. 해방직후의 좌우 갈등과 충돌이 빚어낸 참담했던 역사를 제외하고는 국민 갈등이 지금 같이 심각한 때가 없었다. 보수와 진보로 이념이 갈리고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으로 서로 적대하는 남남(南南)갈등이 ,또 경륜이 무시당하는데서 오는 노소(老少)갈등이 선거가 끝났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국가 존망의 위기감이 더한층 고조되고 있는 현실을 두고 희망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과도기적 홍역현상이라고 힘 가진 당신들은 아직도 그렇게 말 할 것인가. 오로지 선거전에 몰두해 있는 당신들은 불과 20개월 전에 이 땅에서 피어올랐던 국민 한 마음의 그윽한 향기가 그립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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