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함의 극치를 연출 했다우리 속어에 ‘체면이 밥 먹여주느냐’는 말이 있다. 자고로 동방의 예의지국임을 자부해온 이 땅의 선비 문화는 체면을 중시해서 지배계급, 즉 양반 가문에 들면 밥먹고 걷는 습관에 이르기까지를 법도로 따져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이 같은 양반 법도를 지키지 않아 체모를 잃은 선비 양반을 세상은 파락호로 비난해 돌팔매질을 서슴지 않았다.이 때문에 선비들은 찌든 가난 속에서도 체모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며 비록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울망정 체모 잃는 진수성찬을 마다했다. 세상은 이를 지켜보며 도대체 체면이 밥 먹여주느냐고 비아냥대기도 했을 것이다.

삶의 기본이 배불리 먹고 편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옛 선비 문화는 기초부터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 같은 구석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같은 대쪽 선비의 기개가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나라의 맥을 지켜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우선의 배고픔과 당장의 어려움을 모면할 요량으로 선비가 선비답지를 못하고 시정 잡배와 다를 바 없이 뻔뻔했었다면 나라꼴이 어찌되었겠는가, 동방예의지국은커녕 가르침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 오랑캐 민족으로 지구 위의 한 귀퉁이에 존재했을 것이다.염치를 몰라 오랑캐라고 했다왜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가까이 일본을 또 중국을 오랑캐로 일컬었는지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 민족성이 염치를 모르고 윤리를 저버리면서 뻔뻔했던 모습이 도무지 사람 같지를 않았기 때문에 쥐뿔도 없는 우리가 그들 민족을 경멸하고 야유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 모습이 어떠한가. 나라의 내일을 열고 국민의 복된 삶을 이끌어야 할 정치 집단이 온통 자신들의 아방궁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획책했던 경악스러운 일들이 끝없이 벗겨지고 있다. 이러다가 나라가 망해 버리는 것 아니냐는 불안심리가 고조되면서 국민적 개혁 요구가 한결같아졌다.국민의 이 같은 개혁 당위성은 부패 정치인 일부를 지탄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 전반이 최소한 염치를 회복하라는 뜻일 게다. 권력이 있고 황금 덩어리만 보이면 조상 묘라도 떠다 바칠 듯이 얼굴에 철가면을 덮어쓰는 오랑캐의 작태가 세속을 지배하는 한 그 어떤 형태의 계혁도 또 물 건너 보낼 수밖에는 없는 이치다.

화면 속의 뻔뻔한 얼굴들얼마전 뉴스화면 그득히 나타나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나라 장래를 걱정하는 전직 대통령들의 화려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과연 국민들 감회가 어떠했을까. 가뜩이나 비리 정치인들이 검찰에 끌려나오면서 한결같이 억울함을 강변하는 뻔뻔함에 질려있는 터에 그들 전직 대통령들이 쏟아내는 애국 애족의 깊은 사려를 담은 고귀한 말씀들을 듣는 소회가 참으로 기막혔을 것이다. 특히 전두환씨의 당당해하는 모습에서는 형언키 어려운 분노와 함께 뻔뻔함의 극치를 느꼈으리라. 이런 모양새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주소다.쿠데타의 주범으로 또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돼 법정의 최고형을 선고받은 지가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다가 또 다시 둘째 아들의 비리 혐의가 국민시선을 모으고 있고 추징금과 관련해 온갖 해프닝을 벌이는 작태가 국민의 냉소를 사고 있는 정황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뻔뻔할 수가 있는 건지 도무지 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것이 바로 80년대 들면서 8년 세월 가까이나 이 나라 이 민족을 지배하고 다스렸던 치자의 얼굴일진대 이 땅에 지금 무슨 놈의 양심이 남아있다고 정치권이 앞장서서 감히 개혁을 말하고 세상을 확 바꾸자고 국민을 설득하려 드는지 역겹고 가소롭기까지 하다는 표현을 도저히 자제 할 수가 없다.새 정권이 들어서고 정치적 위기 때마다 과거 역사와 상관없이 꼭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전직 대통령들을 불러내서 라이브쇼를 국민들 앞에 보여야 하는 그 상당한 정치적 이유를 오히려 국민이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았으면 좋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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