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민들, 피해자 SNS 계정서 대화 내용 확보…수사 ‘급물살’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지난달 필리핀 세부에서 일어난 한인 피살사건의 진범이 체포됐다. 필리핀에서 근무하는 경찰 주재관과 코리안데스크(한인 사건 처리를 전담하기 위해 파견된 한국 경찰관)가 현지 경찰의 수사 결과에 의문을 품고 재수사한 성과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필리핀 내 한인 관련 사건이 속속 해결되는 모습이다.
 
 
경찰청은 지난 11일 “필리핀 경찰이 세부시 라푸라푸주의 황모(47)씨 피살사건 피의자인 필리핀 국적의 A(필리핀인, 여, 20세)씨와 B(필리핀인, 남, 34세)씨를 지난 5일 검거했다”고 밝혔다. 사건 발생 16일 만이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황 씨의 내연녀, B씨는 A씨의 남자친구인 것으로 밝혀졌다.

세부에서 여행 가이드로 일하던 황 씨는 지난달 20일 오후 필리핀 소재 자택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 이웃에게 발견됐다. 피해자 집에서 나는 악취를 맡은 이웃 주민이 창문을 통해 내부를 살펴보다 사망자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청은 즉시 공동조사팀 3명(감식/범죄분석/시시티브이(CCTV))을 현지에 급파해 경찰주재관(경정 이용상)ㆍ코리안데스크 담당관(경감 심성원)과 함께 현지 경찰 수사를 지원했다.
 
이웃 남성 2명
용의자로 오인

 
발견 당시 황 씨 자택 문은 파손되지 않은 상태로 열려 있었다. 황 씨가 순순히 문을 열어줄 정도의 면식범 소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집 열쇠와 휴대전화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필리핀 경찰은 사건 발생 전 황 씨 이웃에 거주하는 남성 2명이 황 씨의 집 열쇠와 휴대전화가 들어 있는 황 씨의 가방을 훔친 사실을 확인하고 이들을 체포했다. 검거 이후 용의자의 집에서 피해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가 묻은 셔츠도 발견됐다. 이에 따라 필리핀 경찰은 이들을 유력한 살해 용의자로 지목하고 보강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이들의 진술이 엇갈리는 데다 살해 동기가 명확하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구석이 적지 않았다.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의 경찰주재관으로 근무하는 이용상 경정과 코리안데스크 심성원 경감이 이를 놓치지 않았다. 필리핀 경찰이 체포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에 따라 필리핀 경찰의 협조를 얻어 용의자 집에서 발견된 피 묻은 셔츠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국과수 감정 결과 핏자국은 황 씨의 것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필리핀은 사건을 조기 종결하기 위해 용의자를 둔갑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혈흔이 묻은 셔츠를 국내로 보내 DNA를 분석한 결과 3일 만에 피해자 것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와 현지 경찰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현지 경찰은 DNA분석 결과가 신속히 나온 데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 필리핀의 경우 DNA분석이 가능하지만 통상 결과회신까지 최소 1∼3개월이 소요된다.

두 한국 경찰관은 감식 결과를 현지 경찰에 알리고 재수사를 요청했다.

경찰주재관과 교민 전담반은 피살 현장에서 피해자의 휴대 전화가 발견되지 않은 점에 착안, 범인이 휴대 전화를 절취했다고 판단해 피해자의 휴대 전화 관련 사항을 중심으로 공조수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교민들의 활약 역시 돋보였다. 현지 경찰 등이 휴대 전화 위치추적에 집중하는 동안 주 세부분관 행정원과 영사협력원 등 현지 교민들은 인적 연결망을 활용해 피해자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을 확보했다. 유족의 동의를 얻어 계정에 접속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경찰은 황 씨의 계정에서 피의자 A씨와의 대화내용을 찾았다. 계정에는 피의자 A씨가 황 씨에게 “집에 찾아가겠다”고 한 메시지가 있었고 황 씨는 “내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할 수 있겠나”라며 A씨를 질책하는 내용도 있었다. 경찰은 이 같은 내용을 필리핀 경찰에 전했다.

결국 황 씨의 SNS계정을 통해 용의자인 A씨가 사건 당일 피해자인 황 씨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 것을 확인한 필리핀 경찰은 A씨가 일하는 마사지 숍에 경찰관을 급파했다. 그리고 A씨를 4시간 동안 심문한 끝에 지난 5일 오후 6시경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

또한 범행에 가담한 A씨의 남자친구인 B씨도 같은 날 저녁 10시 35분 마약소지 혐의로 검거했고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

진범들의 진술에 따르면 A씨는 마사지사로 황 씨와 비정기적으로 내연관계를 유지해왔으나, 최근 A씨가 황 씨의 집에서 금품을 훔치다가 발각돼 황 씨에게 심한 폭행을 당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A씨가 자신의 남자친구인 B씨와 살인을 모의했고 B씨는 다시 전문 킬러로 소문난 자신의 친구 용의자 C(필리핀인, 미검)씨를 끌어들여 황 씨를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 경찰ㆍ교민이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황 씨에게 ‘훔쳤던 물건을 돌려주겠다’며 사건 당일 오후 11시 30분께 B씨, C씨와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다음날인 0시 23분께 현장에 도착한 뒤 B씨는 망을 봤고 C씨는 미리 준비한 소음기 달린 45구경 권총으로 범행을 벌였다.

필리핀 경찰은 검거된 A씨와 B씨에 대해 살인죄로 검찰에 송치하고 아직 검거하지 못한 용의자 C씨를 추적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어느 누구의 단독적인 노력의 결실이 아닌 경찰주재관, 코리안데스크를 비롯한 교민들이 적극적으로 응원, 협조해 해결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해외 체류 국민들의 안전 확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피살 사건은 올해 들어 필리핀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세부에서는 2014년 8월 이후 처음 발생한 사건이다. 우리 국민의 필리핀 내 피살 사망자는 2015년 11명, 2016년 9명이었다.

필리핀에서 사고가 많은데 기본적으로 총 하나가 25만 원에 거래되고, 그런 총기가 100만 정 정도 있다. 청부살인은 250만 원에 거래된다.

필리핀은 섬도 많고 지문제도가 없는 데다 CCTV도 적고 화소가 낮다. 긴급체포제도 역시 없어서 구속영장을 신청하면 3~6개월 걸리는 등 수사 여건이 굉장히 안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은 치안이 불안한 데다 현지 경찰의 수사 협조도 얻기 힘든 ‘험지’다. 최근 필리핀 코리안데스크 선발 때도 지원자가 없어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최근 필리핀에선 한국인 연루 사건들이 속속 해결되고 있다. 2002년 고객 돈 20억 원을 횡령하고 필리핀으로 도피한 국내 은행 지점장 역시 올 1월 15년 만에 잡혀 강제 송환됐다. 이는 지난해 6월 말 취임한 두테르테 대통령이 현지 경찰의 기강을 다잡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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