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역사왜곡 말고 ‘회고록’ 즉각 폐기하라!”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지난 4월 출간된 이후 ‘역사 쿠데타’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전두환 회고록』에 대해 김정호 변호사가 광주지법에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5·18기념재단을 비롯해 민주유공자유족회, 구속부상자회, 부상자회 등 5월 관련 단체들과 함께였다. 이번 소송은 5·18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 등 역사를 왜곡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출판되거나 시중에 유포되는 것을 막아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회고록의 내용 가운데 김 변호사가 역사왜곡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북한군 개입 문제를 비롯해 헬기사격은 없었다는 주장,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에 대한 학살도 없었다는 주장과 5·18 과정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관여는 전혀 없었다는 주장 등 33가지다. 이미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상황에서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6월 12일, ‘빛고을’ 광주 지산동에 위치한 광주지방법원 앞.

약 20여 명의 5·18단체 회원들이 기자들의 플래시 앞에 결연한 표정으로 섰다. 지난 4월 출판된 전두환 전 대통령 회고록의 출판과 배포 금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리 높여 부르는 이들의 눈빛에는 비장함이 흘렀다.

이윽고 가처분 신청서 법률대리를 맡은 광주지방변호사회 소속 김정호 변호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5·18 가해자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책을 쓴 것은 비열한 행태”라고 지적한 뒤 “피해자들의 가슴에 또 한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회고록을 모두 폐기하라”고 외쳤다.

『전두환 회고록』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서가 법원에 접수된 이날 보수논객으로 알려진 지만원 씨의 책자 『5·18 영상고발』도 함께 발행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이 접수됐다.
 
회고록 낸
전 전 대통령의 의도는?

 
“5월은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광주의 5월은 비극적 참사가 아니라 전 민족이 환희의 광장으로 나서는 출발점이며, 우리는 그 5월을 기념비나 신화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신화의 지평 위에 새로운 행동의 실천을 뿌리내려야 하며 그런 뒤에야 죽은 이들의 피에 값하게 될 것이다.”

광주항쟁 이후 5년 만인 1985년 5월 발간된 광주항쟁 최초의 기록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머리말에서 소설가 황석영 씨는 우리나라 민중항쟁과 민주주의 역사의 값진 체험이었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가치부여대로 이후 대한민국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독재 투쟁에 나섰고 1987년 6·10민주항쟁을 통해 제5공화국 정권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1996년 1월에는 마침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5·18사건에서의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고 1997년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유죄가 확정되면서 마침내 광주학살에 대한 법적·역사적 청산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문민정부에서 특별 사면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7년 4월, 20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전두환 회고록』을 발표하면서 적지 않은 파장이 일었다. 역사적 평가가 끝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칭하고 또 자신을 ‘5·18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5·18기념재단과 유족회, 구속부상자회, 부상자회 등 5월 관련 단체들이 『전두환 회고록』에 대한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결정했고 김정호 변호사가 법률대리를 맡는 등 적극적인 법적 대응에 나섰다.

5·18단체 측이 제출한 가처분 신청서는 총 67쪽으로 방대한 분량이다. 신청서는, 전 씨의 대법원 유죄 확정 판결문, 5·18 백서로 일컬어지는 황석영 작가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지난 5월 발간된 전남대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의 증언록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전일빌딩 헬기사격 탄흔 감정결과’ 등의 생생한 자료가 반영됐다.
 
북한군 투입설?
“가장 악의적이고 허무맹랑한 역사왜곡”

 
그렇다면 가처분 신청서에서 5·18단체 측이 제기한 『전두환 회고록』의 허위주장과 역사왜곡은 무엇일까?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크게 다섯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5·18의 과정에서 다수의 북한군이 개입해 의도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전두환 회고록』 535쪽과 541쪽 등 모두 18곳에 적시되어 있는데 모두 허위라는 게 5·18단체 측의 설명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만원 씨도 오래전부터 거론해 온 것으로 지 씨는 당시 북한군 600여 명이 광주에 잠입해 배후에서 폭동을 주동했다고 주장해 왔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지 씨의 의견을 검증 없이 인용해 썼다.

가장 악의적인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군 개입설’은 이미 개연성 없는 주장으로 공식화 된 바 있다. 광주항쟁이 무자비하게 진압된 이후의 1980년 계엄사 발표에도, 1985년 국방부 재조사에도 북한군의 개입은 거론되지 않았다.

또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 1995년의 검찰 및 국방부 조사와 1996~97년의 5·18재판,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와 2012년 국정원의 비공개 조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7차례의 국가적 차원의 조사가 이뤄졌지만 북한군이 국내에 들어왔다는 증거나 정황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두 번째는 광주항쟁 기간 동안 군의 헬기사격이 없었다는 주장으로 이 또한 최근 전일빌딩에 헬기 기총소사가 증거로 드러난 만큼 명백한 허위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 379쪽 등 4곳에서 헬기 기총소사가 ‘계엄군의 진압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적시했다.

세 번째는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 382쪽에서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고 밝혔고 383쪽에서도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집단발포로 무고한 시민들 상당수가 총에 맞아 숨졌다는 증거와 증언이 무수히 많았고 항쟁 기간 내내 전남대병원 등 광주 소재 병원에 총상환자들이 넘쳐났다는 사실은, 전 씨의 주장이 허무맹랑한 것임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단체 측은 설명했다.

‘자신이 5·18 전 과정에 관여한 바 없다’는 주장(27쪽 등 모두 7곳)과 ‘집단발포 전 시위대의 장갑차에 계엄군이 사망했다’는 주장(470쪽 등 1곳) 역시 사실과 다른 왜곡이라고 단체 측은 밝혔다.
 
5·18, 타 국가 민주화에도 큰 영향 미쳐
 
자신을 ‘5·18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주장하지만, 이는 1997년의 대법원 판결과 항소심 판결에서 내란수괴죄와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유죄가 인정된 사실관계와 법적 판단조차도 모두 부인하는 ‘아전인수’격 처사라는 게 단체 측의 지적이다.

또 단체 측은, 시위대의 장갑차에 의한 공격으로 계엄군이 사망한 것이 아니라 무한궤도 장갑차에 계엄군이 치여 사망한 사고였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5·18단체 측 법률대리인 김 변호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 회고록의 역사왜곡을 조목조목 밝히면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위사실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출판 및 배포를 막지 않으면 역사왜곡이 확산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대응에 나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김 변호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명백한 5·18 가해자임을 강조한 뒤 “법제도의 건강성과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주기 위한 사법부의 준엄한 판단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광주·전남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등 각종 굵직한 시국사건과 민·형사 사건들을 변호해 온 김 변호사는 현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광주·전남지부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한편,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의 참극이자 민주주의 발전의 밑거름이 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발화점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저격사건으로 18년간 이어온 유신체제로 대변되는 군사정권의 붕괴였다.

이른 바 ‘서울의 봄’으로 국민적 민주화의 열망이 크게 일었지만 그해 12월 12일,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로 정국은 급속도로 냉각됐고 이듬해인 1980년 5월 전국적인 대규모 민주화 시위의 전개 속에서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 열기가 대단했던 5월 17일과 18일, 광주시민들에게 가해진 신군부의 가혹한 유혈진압은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27일 새벽, 2만5000명의 계엄군이 투입된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으로 전남도청이 점령되고 결사항전을 외쳤던 시민군들이 살상되거나 진압되면서 막을 내린 5·18은 이후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더불어 민주주의를 향한 광주시민들의 뜨거운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냈으며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키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국제기구인 ‘유네스코’의 평가대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필리핀, 태국, 베트남, 중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세계사적 가치를 갖고 있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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