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 해의 중반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경계에서, 날씨가 더욱 무더워지는 시기의 앞 그리고 산과 바다가 수많은 인파로 뒤덮이기 전에 포항에서 보낸 조금 이른 여름휴가.

 
완연한 초록의 계절이다. 막 시작된 것 같은 봄은 벌써 끝을 향해가고 있고, 어느 틈에 여름이 한 발자국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맘때가 되면 방금 시작한 것 같은 한 해가 벌써 중반에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에 매년 새삼스러움을 느끼곤 한다.

문득 새해 아침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 포항의 호미곶 앞바다에 우뚝 솟아오른 상생의 손 위로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던 풍경이 떠올랐다. 지나온 계절을 돌아보며, 한 해를 맞이하며 다짐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곱씹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닿았고, 기대와 걱정 그리고 떨림이 교차하던 그날의 감정들을 상기하며 포항으로 조금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해질녘의 일출명소, 호미곶 해맞이광장
 

호랑이는 꼬리의 힘으로 달리며 꼬리로 무리를 지휘한다고 한다. 호미곶은 한반도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풍수지리학자 격암 남사고는 호미곶을 우리 땅 천하제일 명당으로 칭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선을 따라 호미곶에 도착하니 바다 반대편으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예상보다 넓은 광장의 규모에 한 번 놀라고 해질녘임에도 불구하고 일출 명소로 알려진 이곳을 찾아온 수많은 여행객들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란다.
        화합과 상생을 의미하는 상생의 손 청동 조형물이 광장과 바다에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에 자리한 상생의 손 뒤로 붉은 해가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익숙한 풍경과 반대로 육지로 저물어가는 해는 한결 온화해진 빛으로 상생의 손을 정면에서 비춰준다.

뒤를 돌아보니 해맞이광장에 있는 또 하나의 상생의 손 뒤로 지는 해가 걸려 해돋이 풍경과 묘하게 포개진다. 그 앞에는 1000년대의 마지막 햇빛과 2000년대의 첫 햇빛 그리고 날짜변경선인 피지 섬의 햇빛 등을 모아놓은 영원의 불씨함이 있어 뉴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던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소환시킨다.

지는 해를 뒤로하고 바다로 이어 걸으며 강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한껏 들이켜 본다. 좋다. 마음을 다잡아보겠노라는 것은 사실 여행을 떠나기 위한 핑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초록 물결, 대보리 청보리밭

 
다음으로 향한 곳은 호미곶 끝자락에 있는 대보리 청보리밭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실제 주민들의 생활터전인 이곳은 여행지로서 따로 관리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차공간이나 편의시설, 여행객들을 위한 안내 등이 없다.
       말 그대로 시골 바닷가에 있는 마을 보리밭인 것이다. 적당히 주차할 만한 곳을 찾아 차를 세워놓고 보리밭을 걸어본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호미곶과는 달리 한적하기만한 정취가 마음에 든다. 끝도 없이 펼쳐진 청보리밭에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자 청보리가 부드럽게 너울지며 초록의 물결을 파란 바다로 흘려보낸다.
       바람에 이리저리 출렁이는 보리밭의 풍경에서 왠지 모를 위안이 전해진다. 청보리밭 한가운데에는 노송 다섯 그루가 담담히 서 있다. 가운데 있는 소나무는 수년 전 태풍으로 부러진 나무를 대신 해 새로이 자리를 잡은 녀석으로 양옆으로 형님 소나무들의 보호를 받으며 곧게 자라나고 있는 모습.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석양빛이 포근하게 스며드는 청보리밭의 풍경을 찬찬히 두 눈에 담아본다.


이른 여름 풍경, 영일대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누각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최근 호미곶을 제치고 포항을 대표하는 여행지로 소개되곤 하는 영일대 해수욕장의 누각, 영일대이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어본다. 해변을 찾아오기에는 아무래도 이른 시기일 거라 생각했는데 일찌감치 시원한 옷차림을 한 많은 이들이 영일대를 찾아왔다.
      영일대 앞바다에는 벌써부터 패러세일링의 계절이 시작됐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 위로 체리와 레몬색 날개가 떠다니는 풍경에 이미 여름 한가운데에 있는 듯하다. 영일대는 야경이 특히 멋진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밝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찬 낮의 영일대도 충분히 포항을 대표할 만큼 아름답다.

해상누각으로 이어지는 다리에서 바라보는, 맑은 날씨만큼 밝은 표정으로 추억을 남기는 사람들의 풍경이 예쁘다.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 누각 위로 오르니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에 맺힌 땀을 시원하게 증발시킨다. 바닷물에 풍덩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영일대의 여름이 머지않은 것이 분명하다.
 
작은 일본,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대게 하면 영덕, 오징어 하면 울릉도가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국내 최대의 대게와 오징어 산지는 구룡포라고 한다. 예로부터 풍부했던 구룡포 어장은 안타깝게도 일제 침탈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항구가 건설되자 일본의 수산업 종사자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구룡포는 금세 일본식 가옥들로 빼곡해졌다. 시간이 흘러 대부분 철거됐지만 구룡포항 뒤편의 골목에 50여 채의 일본식 가옥들이 보존돼 있어 특유의 일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난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한 드라마의 일본거리 장면도 별도의 세트장이 아닌 이 골목을 배경으로 촬영됐다고 하니 생동감은 미루어 짐작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거리 곳곳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풍경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어 그 시절 풍경을 그려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 거리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곳은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의 가옥이다.
     그는 구룡포에서 선어 운반업으로 크게 성공해 부를 쌓았고, 일본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들여와 이곳에 2층짜리 일본식 목조 가옥을 지었다. 하시모토 일가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포항시에서 이를 매입해 지금은 근대역사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건물은 100여 년이 지났지만 보존 상태가 훌륭하다.
     다다미와 각종 가구 및 기구들도 잘 정돈돼 있어 당시의 일본 가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근대역사관을 벗어나는 걸음이 다소 무거운 것은 우리의 아픈 역사가 담긴 곳이 너무 미화돼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근대문화 역사거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픈 역사도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 그림자 드리운 호수길, 오어지 둘레길
 
운제산은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구름을 다리 삼아 서로 오가곤 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의 자락에 큰 저수지가 있고 이를 따라 오어지 둘레길이 조성돼 포항 시민들의 새로운 쉼터로 자리 잡고 있다.
    오어지 둘레길의 시작은 신라시대 지어진 오어사라는 천년고찰이다. 수려한 바위산의 품에 안겨있는 산사가 아늑하고 포근한 정취를 선사한다. 원효교라 불리는 출렁다리를 지나면 약 두 시간가량 소요되는 오어지 둘레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경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언제나 오어지는 여행객들에게 쉽게 길을 내어준다. 잔잔한 호수와 수려한 산세는 한 폭의 산수화처럼 어울리고 호숫가에 산 그림자가 가만히 드리운 풍경이 신선이 머무는 곳처럼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낸다.
    중간 중간 풍경을 감상하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잘 마련돼 있고 남생이 바위, 전망데크, 메타세콰이어길 등 다채로운 풍경을 따라 걷고 다시 다리로 돌아오니 등에 땀이 살짝 배었다. 적당히 가벼운 걸음이었다. 조금 더 더웠더라면 더위에 지쳐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찍 떠나온 휴가가 좋은 점이다.
 
폭포 트레킹, 내연산 청하골
 
이글거리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포항의 계곡으로 향한다.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이 금강산보다 아름답다고 말한 내연산 자락을 굽이굽이 감아돌며 흘러내리는 청하 골은 각기 다른 전설과 수려한 풍경을 지닌 열두 개의 폭포로 유명하다.
   계곡 트레킹의 시작은 천년고찰 보경사다. 일주문을 지나 나타나는 산책길에는 소나무들이 터널을 이루며 보경사로 안내한다. 신라시대 호국의 염원을 담아 세워진 유서 깊은 사찰인 보경사에는 지명법사가 도인에게 전수받은 여덟 면의 거울을 땅에 봉안하고 그 위에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보경사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약수로 목을 축이고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다. 울창한 숲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길이 완만하고 잘 정비돼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다. 아직 첫 번째 폭포가 등장하기도 전인데 갈수록 아름다운 풍경들이 나타나 가다 서다를 반복 하게 만든다.
   계곡을 따라 30분쯤 걸었을까. 제1폭포인 상생폭포가 등장한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려한 경관과 어우러지며 두 개의 폭포가 나란히 떨어지는 풍경이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보는 각도에 따라 폭포의 느낌이 그때그때 달라져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상생폭포를 지나면 잇따라 보현폭포, 삼보폭포, 잠룡폭포, 무봉폭포가 나타나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점입가경이란 이럴 때 적합한 말일 것이다. 그렇게 다시 30분여를 걸으면 청하골 열두 폭포 가운데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관음폭포와 연산폭포에 닿는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절벽과 단아한 관음폭포 그리고 연산폭포로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어우러진 풍경이 마치 기도를 하면 정말로 보살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줄 것처럼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영일만 르네상스, 포항운하
 
70년대에 포항제철소가 들어서고 인구가 크게 증가하자 포항시는 주택난 해결 등을 위해 동빈내항으로 이어지던 물길을 매립해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을 조성했다. 강에서 들어오는 물길이 막히자 바닷물이 동빈내항에 갇혀 오염됐고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을 흘러왔다.
  이곳에 맑은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은 2013년, 포항운하가 뚫리면서 강물과 바닷물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흐르는 물을 따라 자연도 사람도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포항의 새 물길을 따라 운항하고 있는 크루즈에 올라본다.
  유유히 운하를 가로지르는 배의 양옆으로 조성된 공원에는 벤치에 앉아 느긋한 한때를 즐기는 사람, 꽃밭을 배경으로 추억 남기기에 여념이 없는 커플들, 신이 나 여기저기 뛰노는 강아지와 아이들의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맑고 수수한 정취를 만들어낸다.
  철강 도시답게 군데군데 자리한 개성 넘치는 스틸 아트 조형물들을 구경하다 보니 이내 수백 척의 배가 정박한 동빈내항으로 이어진다. 주요 선박과 동빈내항에 대한 선장의 설명이 알차다. 동빈내항을 빠져 나오면 오른쪽으로는 송도해수욕장, 반대편으로는 제철소가 나타난다.

갈매기에게 던져줄 과자를 준비해 온 아이들이 달뜬 표정으로 팔을 한껏 뻗어보지만 갈매기가 좀 체 다가오질 않아 시무룩해지려는 찰나 선장님이 센스를 발휘해 신나는 노래를 틀어주신다.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아이들을 실은 배가 영일만 바다를 상쾌하게 가른다. 포항운하는 아직 조성이 한창 진행 중이라고 하니 시드니, 리우데자네이 루 등과 같은 세계적인 미항을 꿈꾸는 영일만의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

<사진=여행매거진 Go-On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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