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이 성공한 예는 드물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까닭이 다양하게 나타났으나 주체세력의 지나친 이상주의가 실패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며 임기 초 8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상은 있었으나 밑그림이 없었다. 실행계획 부재를 지적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개혁은 구(舊)체제를 허무는 데는 성공했으나 신(新)한국을 세우는 개혁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그의 좌절은 경제위기와 정치위기, 안보위기를 초래했다.
조선시대 중종 때의 조광조 역시 급진적인 개혁 드라이브 때문에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개혁을 시도했다. 특히 백성들이 골고루 잘 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 타협을 멀리한 채 불도저처럼 앞뒤 구분 없이 밀어붙이다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중국 송나라의 왕안석은 문치주의로 허약해진 국가를 개조하기 위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그의 개혁은 황제를 비롯한 관료와 백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불과 5년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과 황제의 변심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의 지나친 원칙론과 다른 사람의 의견과 존재를 무시한 처세가 실패의 근본 이유로 지적된다. 
자신은 변하지 않고 남만 변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 시작된 그의 개혁안은 현장에서 변질되어 오히려 백성들이 세금을 더 내게 되는 일이 발생하자 송나라는 ‘개혁 피로증후군’에 빠졌다. 결국 그는 구법당의 탄핵으로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
중국 전한(前漢)의 관료이자 신(新)나라의 황제로 군림했던 왕망은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 잡기 위해 과감한 개혁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대지주와 대관료들의 이익을 건드리면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경험이 없었고 계급적인 한계 또한 있었는데다 개혁의 대상이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던 것이 큰 재앙이었다. 결국 왕망은 어쩔 수 없이 이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고 더 이상의 개혁을 진행하지 못했다.
종합해 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한 이들의 개혁 드라이브가 실패한 근본적 원인은 이들의 개혁이 모두 열정만 앞서 앞만 보고 달려간 개혁이었다는 사실이다. 
조기 대선으로 탄생한 새 정부가 5대 국정목표로 ‘국민이 주인인 정부’, ‘더불어 잘사는 경제’,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 ‘고르게 발전하는 지역’,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로 제시했다. 또 집권 초기 김영삼 전 대통령에 못지 않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기도 하다. 명분이 있고 논리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대선공약이라는 이유로 정책을 강행하는 모습이 우려스럽다. 정부 내에서조차 개혁에 필요한 재원조달 방안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실천 방안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예상됐던 일이다.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식 개혁을 하다간 김영삼, 조광조, 왕안석, 왕망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그러면 국민이 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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