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운 좋게 살아남았다”

왁싱숍 살인 사건 장소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지난달 6일 서울 강남의 미용업소 여주인을 살해한 뒤 달아난 30대가 경찰에 붙잡혔다. 일부 여성들은 이 사건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1년도 안 돼서 여성 혐오 살인으로 추정되는 살인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지난 6일 강남역 10번 출구에 ‘여성혐오살인 공론화’를 요구하는 여성 1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더 이상의 성차별 폭력과 여성혐오 범죄를 그만두라는 메시지였다. 일요서울은 이들이 내는 목소리를 들어보고 강남역 인근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현장에 찾아가 봤다.

왁싱숍 살인 사건, 인근 주민들 몰랐나···1인 업소 여성들 두려움 떤다
왁싱숍 피해자 유족, ‘공론화’ 상처···강남역 10번 출구 포스트잇 어디로?


강도살인 혐의로 체포된 남성 A씨는 지난 7월 5일 오후 10시 10분경 피해자 B씨의 강남구 역삼동 왁싱(인체 모발 정리)업소(이하 왁싱숍)에서 B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신용카드를 훔친 혐의를 받았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난달 3일 손님으로 가장해 예약을 했다. 예약 날짜에 손님으로 왁싱숍에 들어가 B씨의 손과 발을 청테이프로 묶은 후 흉기로 목 부위를 찔러 살해했다. A씨는 B씨에게 강간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A씨는 곧바로 B씨의 신용카드를 훔쳐 범행 현장을 빠져나가서 현금 200만 원을 인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폐쇄회로(CC)TV(이하 CCTV)에 찍힌 인상착의를 토대로 A씨를 용의자로 특정해 추적하던 중 범행 7시간 만인 이날 오전 5시 5분경 왁싱숍에서 약 300m 떨어진 도로에서 A씨를 검거했다.

당시 경찰은 A씨와 B씨가 서로 모르는 사이이다 보니 돈을 노린 범행으로 파악했다.이후 지난 31일 검찰은 A씨를 강도살인, 성폭력범죄의처벌에관한특례법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한 뒤 재판에 넘겼다.

기자는 지난 10일 왁싱숍 여주인 살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찾아갔다. 해당 업소는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 위치한 빌라의 한 가구였다. 빌라 입구 앞 5m 내외에는 방범용 CCTV와 다른 빌라가 인접해 있다. 또 주차장에는 관리사무실이 보였다. 그러나 기자가 방문한 오전 10시경 관리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고 아무도 없었으며 ‘용무가 있으신 분은 아래 전화로 연락 바랍니다’라는 문구만 실려 있을 뿐이었다.

앞서 사건 발생일이 여름철이다 보니 인근 또는 해당 빌라에서 창문을 열어 놓았던 거주자도 있을 것으로 추정됐지만 당시 경찰의 출동 배경은 피해자 지인에 의한 신고인 것으로 전해졌다.

빌라의 현관문은 디지털 도어락으로 잠겨 있었다. 입구 바로 옆에는 모 업체의 ‘경비구역’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이는 사전에 예약을 한 뒤 방문한 A씨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타 지역에서 1인미용업소를 운영하는 여성 C씨는 “(왁싱숍 살인 사건 이후) 가족들의 연락이 잦다. (그렇다고) 예약 손님을 가려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업소를 운영을 하면서) 일부 남성 손님들이 진상을 부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살인까지 이어진 사건이 발생한 것은 혼자 (업소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큰 충격이자 두려움이다. 동종 업계 종사자인 나로선 내가 사고를 당하지 않은 게 감사하면서도 사건 피해자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상상이 안 된다”고 말했다.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 살인 사건 장소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1년가량이 지난 현재, 사건 현장 상황은 어떠할까. 해당 건물 입구 옆에는 ‘여성안심 화장실. 첨단 비상벨 시스템 작동 중’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사건 발생 전에는 막혀 있었던 화장실 입구가 뚫렸으며 한 공간이었던 화장실이 남녀 공간으로 분리됐다. 화장실 위쪽에 비상벨을 달고 한 켠에는 CCTV를 비치해 놓는 등 경찰과 건물주의 사후조치가 이뤄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공중화장실에 대한 법적‧제도적 미비점은 여전하다. 현행법상 전체 화장실의 약 3%에 해당하는 ‘공중 화장실’에만 남녀 화장실 분리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 지난 6월 서초구 등은 해당 기준을 모든 화장실에 확대 적용할 수 있는 법안을 건의했으나 국회에 계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시스>
    시위 여성들
“침묵과 방관 말라”

 
‘왁싱숍 살인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난 8월 6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여성혐오살인 공론화 시위가 열렸다. 종종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100여명이 훌쩍 넘는 참가자가 시위 장소를 찾았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지난해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 살인 사건’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집회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곳이다. 노래방 살인 사건의 범인은 체포 당시 경찰에 “사회생활에서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해 범행을 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주최 측인 여성혐오살인공론화시위는 이날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나는 오늘도 운 좋게 살아남았다”며 “더 이상의 성차별 폭력과 혐오 범죄는 그만두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일상 속 성적 대상화, 시선 강간, 외모 품평, 생활 곳곳 스며있는 여성혐오 문화에 우린 이미 모두 피해자”라며 “침묵과 방관으로 일관하는 남자들도 가해자”라고 주장했다.

흰색 천막 밑에서 선글라스와 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린 참가자들은 시위가를 부르고 구호를 제창하면서 시위를 이어갔다. 주최 측은 다른 단체와의 세력 연대 없이 뜻을 같이하는 익명의 여성 개인들이 모인 시위라고 밝혔다.

이들은 ‘2015년 강력범죄(흉악) 피해자의 88.9%는 여성이다’, ‘여자보고 조심하라 하는 당신도 잠재적 범죄자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는 지난해 추모 집회 당시 등장했던 문구들과 흡사했다.

그러나 주최 측은 시위와 ‘왁싱숍 여주인 살인사건’과의 연관성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피해자의 유족이 시위를 반대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

주최 측이 개설한 인터넷 카페에는 최근 피해자 유가족이라고 밝힌 네티즌의 글이 올라왔다. 글에는 “이글을 보고 인증(유가족 확인)을 해 달라 요청하면 어떤 방법으로 (인증을) 해드려야 할지 고민하며 글을 올린다. 사건 정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저희(유가족)로선 기사도 이런(시위) 공론화도 상처로 다가온다”며 “저희 유족들은 왁싱샵이니 미용업소니 이런 단어조차도 순간 움츠러든다. 이런 큰 관심과 공론화는 더는 버틸 힘조차 없이 무너지게 한다”고 호소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 카페에서 활동하는 한 네티즌은 ‘이번 시위는 피해자 추모 시위가 아닌 여성 혐오 살인에 관한 시위이다. 더 이상 여성혐오적 범죄를 방관할 수 없다. 여성혐오 살인이 여성혐오라는 것조차 부정당하는 사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반응을 보이며 집회에 진행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이날 구호나 피켓 등에서 해당 사건을 연상시킬 만한 단어는 완전히 배제됐다.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서울 동작구 서울시여성가족재단 2층 성평등도서관으로 이전한 추모 장소
   한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더 이상 추모 포스트잇이 없다. 지난해 말 전국 곳곳에 붙었던 추모 포스트잇 3만5000여 장이 서울 동작구 서울시여성가족재단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현재 이러한 추모자료는 2층 성평등도서관 내 시민 기억 존에서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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