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올림픽 유치 등 스포츠 외교에 힘을 실었던 이건희 회장 결국 사퇴
-동북아 올림픽 앞두고 첩첩산중…위축된 스포츠 외교에 태권도부터 흔들

 
    [일요서울 | 김종현 기자] 병상에 누워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IOC위원직을 내려놓게 되면서 한국 스포츠 외교에 빨간불이 켜졌다. 한때 한국은 IOC에 3명의 위원을 보유할 정도로 스포츠외교 강국을 자처했지만 이제는 유승민 위원 단 1명만을 남기며 변방국가로 물러앉게 됐다. 더욱이 평창동계올림픽을 1년도 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부차원에서 마땅한 대안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체육계가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건희 전 IOC위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지난 11일 스위스 로잔에서 집행위원회를 열고 이건희 회장의 IOC 위원직 사퇴를 발표했다. IOC 측은 “이 회장 가족으로부터 위원 재선임을 고려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퇴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이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IOC 위원 정년인 80세까지는 5년가량 남았음에도 가족들이 더 이상은 대외활동이 쉽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 회장은 1996년 개인 자격으로 IOC위원으로 선출된 이후 21년간 국제무대에서 한국스포츠의 위상을 놓이는 데 앞장섰다. 특히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참석을 필두로 2011년 남아공 더만 IOC 총회 참석까지 1년 반 동안 무려 11차례에 걸쳐 170일간 출장 일정을 소화해낸 유명한 일화를 남긴 바 있다.

다만 사퇴 시기를 놓고서는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의 건강 상태에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전해진 상황에서 갑자기 사퇴한 것은 약 2주 앞으로 다가온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심 선고 등과 연결 짓는 시각도 있다.

앞서 1심 구형에 맞춰 이 회장의 건강 문제가 없다고 밝힌 입장에서 돌연 건강이상설을 증폭시킬 수 있는 IOC위원직 사퇴카드를 꺼내든 것은 다소 앞뒤가 맞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삼성그룹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IOC 사퇴카드로 삼성그룹을 향한 수사와 여론에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1996년으로 돌아간
한국위상 
 
 
유승민 IOC위원
   다만 이 회장의 사퇴로 한국 스포츠 외교에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하다.

한때 3명의 IOC위원을 보유했던 한국은 지난 리우올림픽 때 선출된 유승민 위원이 유일한 IOC위원으로 남게 됐다. 이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김운용·이건희·박용성 IOC위원 등을 보유했던 스포츠 외교 강국의 모습을 뒤로한 채 한 명이던 21년 전( 1996년)으로 돌아간 셈이다.

IOC 위원의 정원은 총 115명으로 개인 70명, 선수위원 15명, 국제경기단체(IF) 대표 15명, NOC(국가올림픽위원회) 자격 15명으로 구성되는데 현재 12명이 공석이다.

이 중 한국은 제한적인 임기를 갖고 있는 유승민 위원이 유일하다. 이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린다. 우선 유 위원의 젊은 나이와 경험은 IOC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윤강로 국제스포츠외교연구원장은 “존재 자체만으로 안보이는 프리미엄이 있었다. 갑자기 사퇴한 배경은 알 수 없지만 한국 스포츠 외교에 비상이 걸린 건 확실하다”고 평가했다.

더욱이 평창올림픽에 이어 2020년 도쿄올림픽,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등 이른바 ‘동북아 올림픽 시대’에 스포츠를 활용한 3국 협력 강화의 기획도 놓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스포츠 외교력이 약회되면 당장 2020년 도쿄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이 된 가라테에 밀러 태권도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여기에 한때 유력한 IOC 위원 후보로 거론됐던 김재열 제일기획 스포츠사업총괄 사장도 현 상황을 감안했을 때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회장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아 스포츠 외교를 담당할 후임이 마땅치 않은 것도 아쉬움이다.

인색한 후계 양성…
스스로 무덤 파


이처럼 황무지로 변해가는 스포츠외교 현장을 두고 일각에서는 ‘사람을 키우지 않는 풍토’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은 한국 스포츠외교의 정점을 달렸지만 후계자를 키우는 데 인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박용성 전 IOC 위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를 두고 체육계에서는 후배들을 끌어주지 않으니 어느 순간 황무지가 펼쳐지게 되고 지속성이 없으니 단절 순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김운용 전 IOC위원
   이와 더불어 정권이 스포츠 외교 자산을 무너뜨린 경우도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도맡아서 준비해왔던 조양호 전 평창조직위원장은 IOC후보 문턱에 이르렀지만 지난 정권에서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또 전명규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는 국제빙상연맹 기술위원으로 추천만 하면 입성할 수 있었지만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의 압력으로 출마조차 못했다.

내우외환이 이어지면서 국제무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상황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의 경우 15개 종목 102개 경기는 7개의 종목별 국제연맹의 주관 아래 열린다. 표면적으로 한국은 신동빈 국제스케연맹(FIS) 집행위원 김재열 국제빙상연맹(ISU) 집행위원, 김나미 국제바이애슬론 연맹(IBU) 부회장 정재호 국제루지연맹(FIL) 부회장 등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개최국 입장을 활용해 진작에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IBSF)나 세계컬링연맹(WCF) 등의 집행부에 진입을 시도하거나 각분과위원회에 진출하는 등 확장을 도모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시기와 방법을 놓쳐버린 뒤다.

IOC와 더불어 세계스포츠계의 한 축인 국제축구연맹(FIFA)에서의 한국 위상도 마찬가지다.

그간 FIFA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입지를 구축해온 정몽준 전 부회장이 담합혐의로 6년 자격정지를 받은 이후 FIFA내에서의 한국의 입지는 크게 위축됐다.

지난 5월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재수 끝에 FIFA 평의회에 입성해 한시름 놓았지만 아직 큰소리를 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이에 대해 윤 원장은 “집행위원과 기술위원을 보유하면 올림픽에서 음으로 양으로 엄청난 이점이 있다”며 “우리 스스로 아군을 죽였다”고 한탄했다. 그는 또 “2018년 평창에서 열리는 총회 때는 적극적으로 IOC에 위원 추가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 올림픽 개최국이니 만큼 배려할 가능성이 있다”며 “한국 스포츠 외교가 지속 가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도 IOC위원의 중요성을 인지한 듯 지난달 토마스 바흐 IOC위원장을 만나 자리에서 한국의 IOC위원이 늘어나길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다급해진 체육계…
차기 IOC위원은 누구


이 회장이 물러남에 따라 누가 이 회장의 뒤를 이를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제계 인사들 중 가장 적합한 후보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거론된다.

정 부회장은 대한양궁협회장으로 한국 양궁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특히 정 부회장의 부친인 정몽구 회장이 1985년부터 1997년까지 양궁협회장을 내리 4회 지냈고 아들인 정 부회장이 2005년부터 10년 넘게 스포츠와의 연결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에 도전 의지가 충분하다면 개인 자격으로 입후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또 이기흥 대한체육회장과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이기흥 회장의 경우 9월 총회를 앞두고 자신을 IOC위원 후보로 ‘셀프 추천’했다가 IOC 집행위원회 추천을 못 받아 떨어지는 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2018년 2월 평창 총회에서 재도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조 총재도 평창 총회에서 승부수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당장 IOC후보 추천 등 한국의 입지를 넓혀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체육계는 말한다. 그러나 체육계 관계자들은 국제 스포츠 인력 양성을 위해 정부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 관계자는 “선수에만 국가대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 외교관도 일종을 국가대표다. 스포츠 외교 국가대표는 정부의 지원과 전략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의 풍토도 한 사람의 역량과 자산을 소중히 여기는 쪽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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